무적 해병대 예비역 중장 김성은 장로는 1924년 3월 14일 경남 창원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2007년 5월 15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83세를 일기로 하늘나라 가셨다. 한평생 기도와 믿음 속에 해병대에 몸담고 나라 겨레사랑에 충성을 다했다. 정일권 장군과의 인연으로 처음엔 육군 소위였으나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권유로 해군 소위로 옮겼다. 1948년 10월 19일 육군 14연대 남로당 일파가 여수 순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압차 참여한 육군 해군 고급 장교들이 용감하게 상륙작전을 감행할 해병대를 창설하기로 뜻을 모았다. 손원일 제독은 해군대령 신현준(예비역 중장) 대령을 초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신현준 사령관은 사양하는 김성은 중령을 해병대 참모장으로 모셨다. 그리하여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해군 장사병 380명으로 대한민국 해병대를 창설했다. 지리산 공비토벌로 전과를 올리다 해병대 창설 1년 만에 6.25 전쟁을 맞았다. 대대나 연대급 병력으로 김성은부대는 고길훈(예비역 소장)부대를 다시 김성은부대로 편성하고 호남일대를 석권하던 북한군을 군산 장항 이리전투(1950. 7. 16)에서 승리를 이루어 적의 진격을 1주일 지연시켰다. 이어 마산 진동리작전 승리로 마산을 지키고 8월 17일 김성은부대는 군사요새지 통영을 되찾기 위해 야밤에 진격해 통영상륙작전에 승리했다. 적 사살 460명, 생포 80명 전과를 거두고 진해로 왔을 때 마가렛 하긴스 종군 여기자가 미국에 귀신도 잡을 해병대 용맹을 타전해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신화를 남겼다. 김성은 대령은 인천상륙작전, 수도탈환작전에 참전하고 중동부전선의 요충지 인제 양구 사이의 도솔산고지탈환작전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해 승리했다.(1951. 6. 19) 도솔산고지 승리에 감격한 이승만 대통령은 무적해병(無敵海兵) 붓글씨로 휘호를 써서 격려했다. 전투단장 김성은 대령은 장단지구전투(1952. 11. 5)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해 중공군 1개 사단을 섬멸했다. 6.25 전쟁중에 해병대 전투에서 김성은 대령은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이라는 영광스런 해병대 상징을 만든 해병이다. 그간 태극무공훈장을 비롯 많은 훈장을 받으며 제4대 해병대사령관에 부임하면서 중장으로 진급되었다. 1963년도 해병대 제대와 함께 39세의 최연소 젊은 나이에 15대 국방장관에 올랐다. 김신조 무리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5년 최장수 국방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들리는 말로는 우스개 소리를 잘해 박정희 대통령을 잘 웃겨드려서 장수 국방장관을 유지했다고 한다.
장관실에서 오늘은 무슨 말로 대통령각하를 웃겨드릴까 그 연구에 깊이 잠기곤 했다는 말도 있다. 김성은 장관이 다녀가면 청와대 결재가 잘 풀렸다는 말이 있다. 해병대 제대 후 신당동 신일교회 장로로 믿음 생활 하신 김성은(金聖恩) 장로 이름은 ‘거룩한 하나님 은혜로 받은 선물’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해병대 출신으로 유일하게 국방장관을 지낸 김성은 장로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가 해병대를 1973년도에 병력을 절반으로 줄이고 해군 제2참모부로 격하시키며 해병대를 해체하자, 해병대사령부를 독립 부활시키는 활동에도 김성은 장로가 기도 많이 하며 힘을 쏟았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힘을 얻어 1987년 노태우 대통령 때 해병대 사령부가 부활되었다. 지금 그 사령부가 경기도 화성시 봉당읍에 있다. 해병대는 4성장군 사령관으로 한국군대는 육․해․공군 해병대 4군체제로 편성해야 막강한 대한민국 국군이 될 것이다. 김성은 장군이 이룩한 ‘귀신잡는 해병’ ‘무적해병’이 최정예부대로 대한의 방패로 있는 나라의 안보는 언제나 튼튼하다. 해병중장 국방장관 출신 김성은 장로는 창원 모범기독가정 출신으로 기도와 믿음으로 해병전투마다 승리를 이루고 제대 후 신일교회 장로로 전국을 돌며 신앙 간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크게 드러낸 모범장로이다. 군가 ‘나가자 해병대’ 씩씩한 노래가 늘 우리 귀에 들리듯 해병대 가는 길에는 오직 승리뿐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