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문제 밖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며 방법을 찾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변방의 통찰이라 부르고 싶다. 장기판에서 훈수를 두는 자는 장기를 두는 당사자보다 앞선 수를 읽는다. 그는 제3자의 입장에서 장기판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작 훈수꾼이 장기를 두는 선수가 되면 그도 예외 없이 장기판의 한복판에서 헤매게 된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길이 보이기도 하고 정작 뻔한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라도 조금 떨어져 세상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 사셨고 그곳에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셨다. 예루살렘 밖에서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바라보셨으므로 예수의 통찰이 위대한 것이다. 그 당시 로마보다 오히려 유대 성전주의자들이 더 문제일 수 있다는 통찰은 변방의 예수였으므로 가능한 것이었다. 역사는 변방으로부터만 혁신이 일어난다. 통찰은 멀리 서서 안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얻어진다. 나는 변방의 영성을 좋아한다. 내게 변방의 영성을 가르쳐 주신 분은 주님이시다. 변방의 영성이 새로운 혁신의 통찰을 주고 그 통찰이 세상을 바꾸게 한다. 변방의 통찰로부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보인다.
내가 몽골을 통해 시대정신과 한반도의 평화를 찾아가는 길이 있다는 통찰을 얻은 것은 변방에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멀리 있어야 길이 보인다. 멀리 보아야 희미하게라도 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교회 안에서는 교회의 문제를 찾지 못한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보면 교회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가급적 교회에서 멀리 떠나 교회를 보아야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앞만 보면 보이지 않는다. 멀리 가려면, 목적지를 분명히 하려면 눈앞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멀리 보는 통찰을 배워야 한다. 지식의 시대가 아니다. 통찰의 시대다. 통찰 없는 삶은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눈앞의 이익만 좇다가 망할 수 있다.
가급적 예루살렘 같은 주류사회로 들어가려 하지 말라. 광야와 갈릴리 같은 변방의 자리로 가는 자유와 용기를 가져야 한다. 통찰의 시대를 살아가려면 멀리 떨어져 가야 한다. 예수처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보이고 길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교회와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통찰하는 삶을 살아야 할 때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