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선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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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인도네시아 Emde의 토착 선교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에서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기도 하지만 필리핀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기독교인의 나라이기도 하다. 2억 2천만 인구의 13-15%가 기독교인이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가 활발한 곳은 물론 인도네시아 동부지역이지만, 자바(Java) 섬에서도 지난 수십 년간 기독교인의 숫자가 크게 증대했다. 비공식적 통계에 따르면, 1965-1971년에 100만 명 이상의 자바 사람들이, 1971-1990년에는 200만 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이런 폭발적인 인도네시아 선교는 많은 갈등을 불러왔다. 그런 점에서 초기 인도네시아 선교 역사에서부터 주목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인도네시아 자바의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정치적 요인들은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그 식민통치의 첫 2세기인 17-18세기 동안 선교를 금지했는데, 그것은 기독교 선교가 자바의 무슬림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며 이로 인해 식민정부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식민당국의 선교 통제는 19세기 초에도 지속되어, 1797년 네덜란드령 해외식민지들에서의 선교를 목적으로 창설된 화란선교협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의 경우, 수십 년 동안 자바족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지 못했다. 또한 식민당국은 1831년 인도에서 인쇄된 최초의 자바어 번역 신약성경이 서마랑(Semarang)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그것을 모두 압수해버리기도 했다. ‘주민들의 평화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 그 성경들은 결국 화물창고에서 모두 썩어버렸다. 이런 인도네시아의 비극적인 선교 역사를 보면, 한국에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우리말 성경 번역이 먼저 한국 청년들에 의해서 전해진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역사이다.

자바인에게 복음을 전한 두 평신도는 Emde와 Coolen이다. 이 두 사람의 선교방식에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 이번 호에서는 지면의 제약으로 Emde만 간략하게 다룬다.

Emde는 독일의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평신도로서 인도네시아에 선원으로 동부 자바의 수라바야에 도착해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시계 수리공의 직업을 가지고 자바 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었을 때인 1814년에 Joseph Kam이라는 목사가 인도네시아 개신교 교회의 목사가 되어 Emde에게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자바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강한 도전을 주었다. Joseph Kam은 수라바야에 기도의 모임을 만들어 놓고 봉사를 하다가 암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Emde가 그 소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의 공부를 ‘세상의 학문’이라고 해서 초등학교 정도 밖에 공부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은 서구적이어서 자바의 문화를 선교에 사용하는 데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Emde의 선교방법은 자바의 전통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철저한 서구적인 형태의 기독교를 전파했다. 특히 그에 의해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은 자바인 그리스도인들은 긴 머리를 자르고, 자바의 전통 옷을 입지 못하고, 서양식(네덜란드 식) 옷을 입고, 네덜란드 말을 배웠다. 심지어 자바인들이 좋아하는 와양(Wayang)까지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자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Kristen Londo’(네덜란드 기독교인)이라고 불렸다. 이런 식으로 서양 기독교를 멀리한 것이 자바 섬이다. 그래서 Coolen을 주목한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은퇴교수, 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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