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중학교 다니던 시절 영어 시간에 어느 날 선생님이 칠판에 이렇게 영어로 썼다. ‘Admiral Lee Soon-Shin was born in Seoul about 400 years ago’라고 적고는 잠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설명했다. 앞에 있는 영문은 ‘이순신 장군은 400년 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마침 그때가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생일이기에 비록 역사 시간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성군인 이순신 장군에 대해 존경심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고 여겨졌다. 덕분에 나 자신도 이순신 장군이 1545년 4월 28일에 태어나 53세인 1598년 12월 16일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 이를 머릿속에 간직하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1905년에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은 대대적인 승리 축하연을 동경에서 열었다. 러․일전쟁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이끈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그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그 파티장에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 제1의 전쟁영웅으로 군신(君臣)으로 추앙받는 도고에게는 여러 헌사가 이어졌는데, 어느 참의원이 “도고 제독은 가히 영국의 넬슨 제독이고 조선의 이순신 장군입니다”라고 축하했다. 이에 도고 제독이 “내게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견됨을 찬양하는 것은 감당할 만하다 하겠으나, 감히 이순신 장군과 비견됨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나는 이순신 장군의 신발끈도 묶지 못하게 미미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후로 도고가 말한 “ㅇㅇ사마의 구두끈도 묶지 못한다”는 말은 일본인들이 겸양을 말할 때 흔하게 사용하는 숙어가 되어버렸다. 그 후에 도고가 어떤 모임에서 이순신의 위대함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와 넬슨은 전 국가적으로 일치단결된 지원을 받아 전투에 임해 뒷걱정 없이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왕의 끝없는 의심과 동료 장군의 끝없는 음해를 받아 모진 고문을 당했고, 정부의 아무런 지원이 없는 가운데 백의종군 하는 등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악조건 가운데서도 23회에 걸친 전쟁을 완벽하게 승리로 이끈 장군으로 내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전신(戰神 )입니다”라고 극찬했다.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이 보여준 전략, 전술, 판단은 철천지 원수인 왜군에 대한 단호한 복수심의 발로였다. 민중을 사랑하는 애민 정신, 사람들을 이끄는 통솔력, 그 어느 것도 모범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물론 시대와 상황이 만든 영웅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이순신이 평소에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준비에 따른 현실적인 판단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그리고 평생동안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결코 뒤로 미루고, 핑계를 대지 않고, 충실하게 이행해 죽기까지 실천한 그의 철저한 마음가짐에 기인했다.
그의 죽음은 그가 명한 대로 전쟁이 끝나고 왜군이 물러난 후에야 알려졌고, 그의 죽음은 평소에 그를 하급자로 취급했지만, 사실은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명나라 도독 진린이 커다란 아쉬움에 통곡하는 계기가 되었고, 온 나라 백성들이 통곡함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빛나게 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비록 일본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이었지만 식견이 있는 많은 일본인들로부터도 마음속으로는 존경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 백성들은 애국이 무엇이며, 비록 그대로 따라하지는 뭇해도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어떤 것인가는 그를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