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강단] 인생의 목적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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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재벌 딸이 자살을 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며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자아정체성에 있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것이 목숨까지 연결될 수 있다. 매슬로 욕구 5단계에서 인간은 3단계 소속에서 존중 그리고 자아실현을 통해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인기 강사들의 이야기는 돈 버는 법이 아니라 가족, 자녀 그리고 행복에 대한 주제들이다. 이런 화두에서 자아정체성은 남과 관계를 통해 실행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목적은 개인의 성취감과 평안, 행복감 그 이상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신이 있다는 가정이 없는 삶은 삶의 목적과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한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제외시킨다면 인생의 목적도 아니 출발점도 가질 수 없다.

우주의 시작은 창세기다. 거기에는 추측이나 과학적 근거가 아닌 말씀을 바탕으로 창조목적이 나온다. 성경은 특별계시다. 곧 이성적인 접근으론 이해나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창세기, 우주의 시작을 통하지 않고는 계시록, 세상의 마지막도 알 수 없다. 본문 16절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므로 하늘과 땅, 보이는 주관들, 정사들 그리고 권세들이 다 그로 인하여 그를 위하여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세상이 그런 것처럼 인생의 시작은 그에게 출발한다. 욥기 12장 10절에 생물의 혼, 인생의 영이 다 그의 손에 나온 것처럼 만사가 그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의 삶, 근본원리, 인간의 본질 그리고 세계관을 탐구한다. 인생의 고민은 철학적이다. 나는 무엇이 되길 원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답은 16절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

창조주를 인정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두 인생이 달라진다. 그럼 진화론은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이 이미 신이 된 자들이다. 그 이유는 로마서 8장 6절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음에도 사람들은 신이 된 자의 결말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자신에 대한 집착의 막다른 골목이 사망이다. 하지만 창조론을 인정하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고 탁 트인 광대한 자유로운 삶이 보장된다.

인생의 첫 단추를 이렇게 창조주로 끼운다면 이제 그를 생의 주관자가 되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자신을 알아간다. 그런데 부모의 그런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시설에 있는 아동들은 식탐이나 게임 등 엉뚱한 덫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인생의 주인이 없는 자도 마찬가지다. 본문 17절에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라고 했다. 인생에서 ‘먼저’가 없으면 자신이 ‘먼저’가 된다. 그 이후론 모든 것을 자신이 주관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 노릇이다. 아버지 노릇, 어머니 노릇 하기도 얼마나 힘들던가. 하물며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고 있으니 매 순간 근심과 걱정을 떠날 수가 없다.

15절에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곧 하나님이 인생의 주관자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요셉은 창세기 45장에서 형들에게 하나님은 큰 구원을 베푸시려 나를 먼저 이곳에 보냈다고 고백한다. 형에 대한 앙갚음 대신 매 순간 생의 주관자가 되셨던 만사의 내비게이션이신 하나님을 요셉은 철저히 체감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리라.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이 할 수 없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내 생의 컨트롤타워(CONTROL TOWER)가 되신다면 어떤 고난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의 길로 나갈 수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출발점이요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다. 본문 18절에 그는 교회의 머리라고 했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요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그렇다. 만물보다 먼저 (창조주) 만물과 함께(주관자)가 되신 이가 친히 만물의 으뜸(교회의 머리)이 되심이 당연한 도리다. 왜 그가 만물의 으뜸이 되는가. 교회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계성을 갖고 살아가는데 그가 재림하심으로 만물을 심판하실 때 교회적 삶이 근거가 되신다.

18절에 그는 죽은 자들보다 먼저 나신 자요, 이것은 부활이다. 인생의 목적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를 인정하고 그가 생을 주관하므로 부활의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된다. 21세기 문화는 한 마디로 뉴-에이지(New-Age)다. 그들의 모토는 ‘나는 하나님’이다. 사단은 절대성을 부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상대적 미를 인정하므로 절대적인 모든 것을 부인한다. 그렇다. 지금은 머리가 없는 인생으로 살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부활하실 주님 앞에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2대 교리 십자가와 부활을 그들은 부인하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라덴은 2천600억을 유산으로 받았지만 그는 수천 미국인을 죽이는 데에 올인했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는가. 마태복음 16장 25절에 분명하게 그를 따르는 자에 대한 미션을 제시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인생의 출발점을 알 때 창조주와 주관자 그리고 교회의 머리를 믿고 의지하므로 이러한 놀라운 생명을 얻게 된다.

한억만 목사

<강릉하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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