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천황에게 충성문 강요받자 절필
청년 전영택은 18세에 일본으로 유학 靑山학원 신학부(감리교계)를 졸업하고 귀국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9년 3월 1일 동경유학중 유학생 중심의 독립선언 집회를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이 무렵 김동인, 주요한 등과 함께 최초의 동인지 <창조>를 발간하기도 했다.
3.1만세운동에 이어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일제를 비판하는 등 독립운동에 의지가 강했다. 일경에 의해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벽서(壁書)
다시 한 칼이, 내 가슴에
원수와(왕)의 충신되란 맹세라니
이 맹세 내 붓으로 써 펴내라니
아프구나, 이 칼이 더 아프구나
몇십년 아낀 내 붓 들어
이 글을 쓰단말가
꺽어라, 꺽어라, 내 혼도 꺽이누나.
작가 전영택 목사의 절필 시 ‘벽서’는 일본 황제에게 충성 맹세할 것을 강요 받은데 대한 거부의 뜻으로 쓴 절필을 선언한 시이다. 항일에의 의지를 뚜렷이 공개한 것은 절필이 절명(絶命)의 사태까지 각오하고 쓴 것이 아니겠는가.
일부 문인들이 일제의 강요에 따라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의지를 훼절한 예가 있었으나 늘봄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절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사건이었다.
필명을 늘봄, 장춘(長春), 추호(秋胡), 불수레 등 여럿을 갖고 있었으나 늘봄을 애용했다. ‘늘봄’이라는 말뜻이 주는 부드럽고 안온(安穩)한 인상은 그의 외유내강한 인품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즉 신앙적 바탕에 근엄한 독립투사의 역사를 남긴 작가였다.
늘봄의 인생 반려자인 아내 채혜수(蔡惠秀, 채애오라) 여사 또한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박옥란 박사의 <기독교 여성지도자 채애오라의 삶과 신앙에 대한 선교적 연구>에 따르면 채 여사는 3.1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일화가 상세히 들어있다.
채혜수 여사는 1919년 3월 1일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고종황제 붕어(崩御, 1919년 1월 21일) 추념식에 참석했다. 추념식이 끝나자 교회 목사님이 3.1운동의 일환으로 강단에서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부르고 일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교인과 일반 조문객이 거리로 나가 품속에 숨겼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행진하는 과정에서 일경에게 맞아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갔다.
전영택 목사가 쓴 수필에서는 채혜수와 결혼한 다음날 아침 조반식사를 하다가 일경이 들이닥쳐 연행해 갔다. 3.1만세운동 가담혐의로 1년 2개월의 형량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신병으로 10개월만에 출옥했던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새벗, 1960년 3월호)
박이도 장로
<현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