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의 권위 무시한 Coolen의 선교
한국 통합총회는 인도네시아를 위해 1971년 9월에 장신대 신약학 교수인 박창환·현수삼 선교사 부부를 최초로 파송했다. 당시 총회가 새번역 성경에서 예수님에 관한 기독론적 칭호인 인자를 ‘사람의 아들’로 번역한 것을 문제 삼아 징계하자 인도네시아 선교지로 떠난 박창환 선교사는 현지인 목회자와 함께 학교를 설립해 장신대 유치원 경영의 경험을 살려 유아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영어 성경을 가르치며 선교 사역의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통합 교단의 때늦은 선교보다 훨씬 앞서서 화란선교회가 인도네시아에 첫발을 디뎠다.
화란선교회는 초기에 앞서 살펴본 독일인 Emde와 러시아 이주민 혼혈인 Coolen이라는 평신도를 중심으로 선교했다. 자바섬 수라바야에 독일인 경건주의자 Emde가 시계 제조공으로 선교했다. Emde는 현지인 여성과 결혼해 교회를 설립했다. 또한 공무원 출신인 Coolen도 토착적 선교활동으로 교회를 설립했다.
인도네시아 선교에서 Emde와 마찬가지로 Coolen은 19세기 동부 자바의 응고로(Ngoro)에 있는 아방간(abangans)족에게 복음을 전한 토착 교회의 선구자이다. 자바의 민간전통에 따라 마을의 창시자(cikal bakal)는 마을의 종교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큰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을의 창시자는 이슬람 사원을 세우는 등 마을의 정체성을 경건한 무슬림 즉 산뜨리(santri) 사회로 정할 수도 있었고, 혹은 정령의 사당(dhanyang)을 짓는 등 ‘자바주의적’(Javanist) 정체성(kejawen, cara Jawa)을 갖게끔 할 수도 있었다.
Coolen은 한 러시아 이주민과 자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는 유럽인(혼혈 자녀들도 포함)에게만 주어지는 토지임차권을 이용해 1830년에 브란따스 강 하류의 142헥타르에 달하는 정글지역 토지에 대한 사용권을 획득했다. 그는 자신의 농장을 건설한 후 나머지 토지를 땅에 굶주려 있던 이주민들에게 임대해주었다. Coolen은 유럽식 의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기독교적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럽인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경제적 후원, 족장적 권위, 문화적 감수성 등의 묘한 혼합을 통해 수백 명의 농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Coolen은 한 번영하는 기독교적 마을을 세웠다.
Coolen은 유럽인들의 권위를 무시함으로써 네덜란드 선교사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세례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유럽적 관습이라고 주장해 그것에 반대했다. 그는 유럽인 선교사들이 요구한 바에 따라 머리를 자르고 의복을 바꾸고 기독교적 이름을 택한 모든 자바족 사람을 마을로부터 추방했다. Coolen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유럽적 관습으로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발전에 장애가 될 뿐이었다. 그러나 토지를 빼앗기고 선교사들로부터 멸시받은 Coolen은 점차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그의 기독교 마을은 결국에는 무질서에 빠지게 되었다. 그 전체 과정을 통해 유럽인 선교사들은 토착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독립을 허용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리하여 Coolen 사건 이후 자바의 모든 교회는 다시 화란선교회의 직접적 권위에 예속되었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은퇴교수, 한국교회정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