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최봉석  목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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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석의 세례, 열정 솟구쳐 평생 전도 헌신

삭주교회 설립… 지나가는 모든 사람 전도

최봉석은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면 전력을 다하는 성품이라 열심히 믿었다. 1903년 34세 때 부인과 함께 학습을 받았고, 평양에서 감리교회의 노블(W.A. Noble; 魯晉乙)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해 불덩이가 가슴에 떨어지는 꿈을 꾼 후부터 전도하는 열정이 솟구쳐 이후 평생을 전도하는 데 헌신했다.

삭주교회의 설립자 백유계(白留溪)는 유지였고, 한의사였다. 병 고치러 오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시작한 것이 결국, 1896년 교회를 세우기까지 발전했다. 백유계를 전도한 이는 그의 고종사촌 동생인 양전백이었다. 양전백은 1895년 마펫 선교사로부터 24세 때 세례를 받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초신자였다. 그가 고종사촌 형에게 전도해서 삭주읍교회가 서게 된 것이었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 1896년에 분명히 이 사실이 기록되었다. 백유계는 양전백에게 전도를 받은 후에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서적을 잔뜩 사서 지고 갔다고 했다. 그래서 이웃들에게 전파했는데 남녀 다수의 신도가 생겼다. 다음 해 1897년 기와집 일곱 칸을 사고 초가 여섯 칸을 더 사서 교회를 세웠다.

1902년 최봉석이 세례를 받을 무렵에는 의주가 가장 복음이 많이 들어온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예수를 믿은 백홍준, 이응찬 등도 의주 청년이었다. 그리고 백홍준은 한국 최초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최초 설립자인 서상륜도 의주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 양전백 목사도 의주 사람이었다.

우리 배달민족은 사랑이 있는 민족이었다. 그 사랑은 자식, 이웃, 친구, 임금 사랑 등이다. 그러나 그 사랑에도 불구하고 주님 사랑 같은 영원한 사랑, 빛 된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과 빛을 발견한 이곳의 청년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맹호출림(猛虎出林)의 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펫 선교사가 양전백에게, 양전백이 백유계에게, 백유계가 삭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최봉석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경로였다.

1903년부터 조선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불고, 1906년에는 교인의 수가 4만 명을 돌파했다. 최봉석은 양전백의 추천으로 매서인(賣書人)이 되어 벽동, 강계, 위원, 초산, 자성, 창성 및 압록강 건너 통화까지 가서 전도하고, 만주 땅까지 다니며 일본인들의 교회 박해 소식을 들었다. 그는 1906년 삭주교회 영수가 되었고,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그해 벽동읍교회 조사가 되었다.

38세의 중년에 봉급은 30원으로 아들 광윤, 광선과 네 식구가 살아가기에 충분했다. 최 조사는 가가호호를 다니며 전도에 주력했고,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그리하여 25평 기와집을 ‘ㄱ’자 교회로 신축해서 가운데 휘장을 쳐서 남녀 간에 서로 보이지 않게 막고 예배를 드렸다. 교인 수가 100명 정도 되었으니 당시로는 큰 교회였다.

한번은 방앗간 앞을 지나다가 그 주인에게 전도하려고 “예수천당!” 하고 방앗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망아지는 놀라 뛰고 방아는 엎어져 난리가 났다. 주인이 최 조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예수천당!”을 외쳤다. 그 방앗간 주인은 뒷날 열심 있는 교인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남만주 철도가 일본 사람의 손에 넘어갔고,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최봉석은 무엇인가 자기 목소리와 억양을 잘 조절해서 마귀가 탁 거꾸러지게 해야만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 중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한 번씩은 “예수 믿어라!” 하고 말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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