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19년 스위스의 취리히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그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중요한 것은 개혁교회의 기초를 놓은 운동이라는 것이며, 이 개혁교회의 범주 안에 장로교회가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회가 70% 이상인 한국교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루터 이상으로 츠빙글리가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츠빙글리 이후 스위스에는 그 사상이 볼링거와 칼뱅에 의해 계승되어 종교개혁의 불꽃이 타올랐으며, 이 개혁의 불길은 독일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미국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인문주의 신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1516년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 번역은 그의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당시 가톨릭이 사용하던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a)역을 문제가 많은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원문에서 새로 번역한 라틴어 번역본을 헬라어 원문과 함께 대조할 수 있는 성경을 출판했다. 그는 이렇게 원문과 번역본을 함께 대조할 수 있는 성경을 통해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의 성경이 문제가 많고 원문과 다른 의미의 번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운동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의 번역 성경을 탐독하면서 종교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가톨릭이 사용하던 교회력을 과감히 버리고 성경본문을 스스로 선택해 강해설교를 시작했다. 이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개신교 신학의 특징인 바로 ‘오늘’과 ‘여기’에 기초해 설교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청이 정해준 본문이 아닌 모여든 청중의 삶과 신앙에 필요한 성경 본문에 의한 설교를 했다. 그리고 평신도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국어인 독일어로 설교했는데, 이는 라틴어 이외의 다른 언어를 허용하지 않았던 로마 교황청에 대해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그는 또한 루터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회개가 없는 용서는 성경적이 아님을 강조했다.
교회의 개혁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계절에 또 다른 형태의 ‘면죄부 판매’와 ‘회개 없는 용서’ 같은 사악함이 한국교회를 망치고 있음을 고발한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