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광야에서 만난 은인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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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하루 세 끼 밥을 먹여 주고 잠자리도 깨끗하게 관리해 주는 좋은 고아원이긴 해도 내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정상인 아이들이 나를 구타하면서 놀림감으로 삼는다는 것과 모두 남산초등학교에서 공부하는데 나는 그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쁨도 잠깐일 뿐 눈먼 왕자거지의 서러움은 커져만 갔다. 친구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져 나는 원장 선생님을 찾아 뵙고 그동안의 돌보심에 감사 드린 후 한 달만에 그 고아원을 나왔다.

미군 병사가 입혀 준 옷과 고아원에서 받은 옷가지를 입은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해 보였다. 그러나 그 옷을 입고 거지생활을 하려니까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기는커녕 멀쩡한 놈이 구걸한다면서 문전박대하기 일쑤였다.

어디 그뿐인가. 왕초거지들이 새 옷을 빼앗아 가고 그들이 입던 남루한 누더기 옷을 대신 주었다. 영락없이 왕자거지로 다시 태어난 나는 남대문을 비롯해 동대문과 서울역, 상가 등을 돌면서 열심히 구걸을 했다. 그 당시 거지들의 활동 주무대를 누비고 다닌 것이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겪은 비참한 모습들을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루는 구걸 행각을 끝내고 빈집을 찾아서 동료 거지들과 하룻밤을 지새우려고 하다가 혼쭐난 적이 있었다. 폭격에 맞아 죽었는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집을 재빨리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종군 목사님과의 만남

이렇게 무의미한 거지생활을 하다가 하루는 미군 종군 목사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나를 자기 부대로 데려가서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힌 후 용산 삼각지에 있는 경천애인사에 데려다 주었다. 그곳 역시 불교 사찰이 있던 자리로 감리교 목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이었다. 감리교 계통의 장00 목사님이 원장으로 있는 그곳에는 400~500명의 고아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친절한 종군 목사님은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고 2주에 한번씩 들러 초콜릿, 과자, 빵 등을 갖다 주면서 영어도 한마디씩 가르쳐 주곤 했다. 내가 영어 회화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된 동기가 아마도 그 당시에 받은 영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경천애인사는 사찰로 겨울철에는 난방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연탄 난로를 피워 주기는 했으나 20~30명이 따뜻하게 잠을 잘 수가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어떤 때 윗방에서 잠자던 아이들이 오줌을 싸면 밑으로 흘러내려 얼굴과 입으로 들어오는 적도 있었다.

식사는 지난번 삼애고아원에 비교도 안 될 만큼 형편없었다. 꽁보리밥에다 소금국이나 우거짓국 정도였고, 식당이 너무나 추워서 그나마 당번이 타다가 주는 밥은 이내 다 식어 버리기가 일쑤였다. 경천애인사는 훗날 삼각지 용산제일감리교회가 되었고, 현재 옆 건물을 천주교회당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몇 년 전 그곳을 방문했다. 그 옛날 일들을 회상하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광야 길에서 은혜를 베풀어준 여러 목사님들의 도움에 대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들이 행한 선행이 주님을 사랑하는 어린 소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공로가 되게 축복하소서!”

그곳 역시 내가 머물 곳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곳에 간 지 석 달이 지날 무렵, 이혜문이란 분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와서 귀띔해 주었다. 용산 근방에 나와 같은 장애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고아원이 있는데 그곳 이름이 천애원이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여러 종류의 장애자들에게 장애 정도에 따라 그에 맞는 공부를 시켜 준다고 했다. 기쁜 소식이었다.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원장인 장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천애원으로 갈 수 있었다.

불쌍한 전쟁 고아들

천애원은 원효로의 용산 경찰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금은 안식교회에서 운영하는 삼육재활원으로 발전했다. 그 당시 천애원을 세운 분은 민 원장이었고 그분의 막내따님은 현재 모 병원 안과 의사로 있으며, 내과 의사와 결혼해 함께 의술 활동을 하고 있다.

천애원은 온갖 종류의 어린이 장애자들의 집합소였다. 간질환자를 비롯해 정신박약아, 다리가 잘린 사람이나 앉은뱅이, 농아, 그리고 나처럼 시각장애인 등 200여 명이 함께 수용되어 있는 곳이었다. 시각장애인은 나 한 사람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곳의 딱한 사정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아직 어리고 시각장애가 있던 나에게는 도저히 버텨내기 힘든 곳이었다.

천애원은 또 하나의 분노로 가득한 야생 동물원과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내 앞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광경들을 보며 나는 무서운 생각부터 들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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