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화란선교회 달리 독자적인 한인 선교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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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 박창환 학장의 인도네시아 선교 전개

1816년에 영국으로부터 인도네시아를 되돌려 받은 네덜란드는 식민지 경영권을 동인도회사로부터 식민 정부로 이관시켰다. 이때 왕인 월리암스 1세는 1815년, 1835년에 걸쳐서 식민지 교회 운영을 본국 교회로부터 식민지 장관에게 귀속시키는 왕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식민지 정부가 관리하는 ‘국립교회’(State Church)가 되었다. 그 후 1930년이 되어서야 개신교 교회는 식민지 정부로부터 자립하게 된다. 19세기 초부터는 외국의 선교 단체들의 선교사 파송이 본격화되었다. 18세기부터 1930년 사이에 네덜란드를 비롯해 독일, 미국, 스위스, 영국 등지에서 선교사들이 도착해 30여 개의 지역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64년에는 개신교도가 225만 명에 이르는 성장을 보였다.

네덜란드 선교협회는 1822년부터 클레베스(Celeves)에서 활동을 했고 1826년 이후에는 헬렌두른이 동부지역에서 선교해 18만 명이 개종했다. 독일 루터파의 라인선교협회는 놈멘센(Nommensen)을 중심으로 1851년경부터 선교를 시작해 1910년에는 3만 명, 1930년에는 80만 명으로 이슬람교의 개신교 개종자가 증가해 최초의 자립교회로 성장했다. 이슬람교의 세력이 강력한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많은 사람이 개종한 것은 유례가 많지 않다. 내용상으로 볼 때 유럽으로부터 지원받아 세워져서 계속적인 재정적 후원을 받은 교회들은 오랫동안 유럽 본국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약점이 있었다. 교회들은 1930년 이후부터 자립하기 시작해 1950년에 이르러 행정적, 재정적으로 완전히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 후에 일본의 독립 전쟁을 거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출범한 후에 인도네시아에서 아시아 교회들도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화란선교회나 유럽 단체의 지원과는 무관하게 한국의 인도네시아 선교는 1971년대 초에 시작해 현재까지 독자적인 역사가 있는데, 몇 시기로 구분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970년대에는 한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선교에 대한 후원이 적었음에도, 인도네시아에 선교를 처음으로 시작한 시기로서 그 의미가 있다. 최초의 선교사로는 장신대 학장 출신의 박창환 선교사였다. 1971년 9월 12일 박창환 선교사는 대학 강단에서 조기 은퇴해 대구 선교회의 후원하에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파송으로 인도네시아에 첫 번째로 파송되어서 인도네시아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개혁교단(GPIB)의 동역선교사로 사역했으며 방카섬 숭아이리앗의 현지인 교회인 오라 엣 라보라(ORA ET LABORA) 교회를 목회했으며, 유치원도 세워서 교육을 통한 선교도 병행했다. 그는 입국한 지 수 개월 만에 현지 언어를 습득해 설교를 하는 등 첫 선교사로서 큰 성과를 올렸다. 

1971년 12월 30일 서만수 선교사가 충현교회의 후원으로 파송되었다. 그는 그곳 교회 연합기구의 요청으로 15일간에 걸쳐서 서부 자바 일대를 순회하면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토라자마마사 기독교단을 답사했다.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한국 선교부의 재단법인 등록을 마쳐서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자카르타에서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한인교회인 자카르타 연합교회를 창립해 한인목회와 개척선교를 했다. 그리고 임마누엘 신학교, 할렐루야 아기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사역도 병행했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은퇴교수, 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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