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한국과 한글사랑 선구자 미국 헐버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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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인이요, 죽어서도 미국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 하신 미국인 헐버트 박사는 1863년 1월 26일생으로 미국 동북부 버몬트에서 태어난 분으로 우리 한국 독립운동과 한글사랑에 한평생을 다 바친 위대한 인물이다. 1886년 7월 5일 23세의 청년으로 고종이 세운 근대관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했다. 제물포항으로 입국 4일만에 한글을 읽고 쓰며 일주일 지나면서 한국사람들이 제나라 글인 한글을 무시하는 태도와 중국글자 한자에 관심 깊은 것을 알아차렸다. 안타까웠다. 헐버트 박사는 조선 입국 4년 반만에 한글교육을 위해 1891년 최초 한글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발행했다. ‘선비 백성이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책 이름을 지었다. 천문, 지리 각 나라 정부 형태, 사회제도, 풍습, 산업, 교육, 군사 등에 관한 다양한 지식이 담겨 있어 일반인에게도 유용한 책이다. 

이 책 서문에도 조선 사람들이 쉬운 한글을 두고 어려운 한자 즐기는 것을 슬퍼했다. 헐버트는 교육이 살길이다 생각하고 육영공원 뿐 아니라 배재학당 한성사범, 관립중학 ‘경기고교’ 등에서 20여 년 신학문의 길 민족의식, 애국심을 깊이 심어 주었다. 한글이 영어보다 우수하고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한글의 가치를 높혀 주었다. 배재학당 교단에 섰을 때 우리 국어의 횃불 주시경(1894)과 이승만(1895)을 제자로 만났다. 주시경은 서재필이 만든 독립신문 교정일을 주시경이 보게 하고 영문판 편집은 헐버트 자신이 맡았다. ‘사민필지’에서부터 띄어쓰기, 문장부호 쓰기 등의 한글맞춤법 기초를 세웠다. 헐버트 박사는 우리 ‘한국사’를 연구하며 세종대왕의 자주 민주 문화정신을 터득하고 과학글자인 한글사랑에 매료되면서 한민족의 기원을 한국어를 통해 연구하고 한국어가 영어보다 우수한 소리글자임을 터득했다. 헐버트 박사는 한국의 속담, 음악, 예술, 시, 소설 등에 관한 논문으로 한국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며 한국의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한국 판소리 소설이 서양보다 그 예술성이 높다고 했다. 아리랑을 채보하고 작곡해 세계에 알려 주었다. 우리의 금속활자 거북선, 한글 등의 발명품을 내세우며 한민족은 영리하며 독창성 자주성이 강하다고 했다. 우리 한글 사랑과 한국문화 세계 보급에 힘쓴 헐버트는 한국독립운동에도 앞장서서 일제와 맞서고 친일정책을 쓰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도 비난했다. 명성황후 시해 당한 후 고종 불침번을 서서 고종을 보호하고 고종 뜻에 따라 을사늑약 무효투쟁을 하며 고종밀서를 루즈벨트에게 전하는 밀사도 했다. 그리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고종밀사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 일제로부터 추방당해 미국에서 한국 문화운동 독립투쟁에 최선을 다했다. 광복된 한국 이승만 초대 대통령 초청으로 1949년 8월 5일 한국에 왔으나 노환의 여독으로 일주일만에 별세해 외국인 최초 사회장으로 그의 소원에 따라 마포 양화진외국인묘원에 묻혀 주무신다. 63년간 한글사랑 한국 독립운동에 몸바친 헐버트에 대한 대접이 50년간 너무 소홀했다. 

여순 감옥의 애국지사 안중근 의사는 헐버트는 한국 사람이 하루도 잊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말했다. 그런데 너무 잊혀진 헐버트 박사를 뜻깊게 발견한 김동진 선생이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김대중 대통령 휘호로 무덤에 비석도 세워 드렸다. 세종문화회관 뒤에 한글학회와 힘을 합쳐 2013년 12월 한글인물 주시경 선생과 함께 헐버트 조형물을 세웠다. 김동진 이사장은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다’의 귀한 저서도 출판하고 책 독후감도 청소년들에게 받고 있다. 해마다 8월에 김동진 회장과 정용호 사무총장이 함께 헐버트 산소 앞 교회에서 경건하게 추모식을 드리며 받은 독립훈장 품격을 나라는 한등급 더 높혀 주길 바라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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