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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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발행된 《21세기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펼쳐보면 상단 좌측에는 「T.Sasao 1897」로 되어 있고, 상단 우측에는 「박재훈 1967」로 표기가 되어 있다. 이 찬송은 「사사오」가 1897년 작사하였고 1967년 박재훈이 작곡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찬송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의 작사가는 놀랍게도 일본인이다. 작사가 「사사오 데쓰 사부로(笹尾錢三郞, T.Sasao, 1868~1914)」 목사는 불교를 믿는 전형적인 일본인 가정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사사오」는 중학생 시절, 갑작스럽게 폐렴에 걸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사사오」는 이에 절망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버는 무역상이 되려고 경영학을 전공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은 「사사오」는 목사가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생활했다. 목사 내외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사사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전도 집회에 참가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후 「사사오」는 자신처럼 돈을 벌려고 미국에 건너온 일본인들에게 예수를 전하기로 결심했다. 샌프란시스코 일본인 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주일학교를 섬겼고 시애틀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전도에 매진(邁進)했다. 

1894년, 26세가 된 「사사오」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자신의 조국인 일본에 전하고자 목사가 되어 귀국했다. 당시 일본에서 선교하던 영국인 「벅스턴(Barclay F. Buxton, 1860~1946)」 선교사를 도와 일본 전역을 돌면서 전도 집회를 열었다. 또 많은 찬송가를 번역하고 창작해 「구원의 노래(1894)」라는 찬송집을 발행했다. 이 찬송집에 실린 곡 중 하나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사사오」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에 기초하여 작사한 이 찬양으로 복음의 불모지 일본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전하는데 온힘을 다하였다.  

찬송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라는 우리말 가사는 우리나라 성결교회 최초의 신학자인 이장하(李章夏, 1886~1935?) 목사가 번역해서 1919년 성결교에서 발행한 「신증복음가」 46장에 처음으로 수록되었다. 이후 한국 교회는 1949년 초교파적인 찬송가 「합동찬송가」를 발행했고 1967년 「개편찬송가」에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실렸는데 박재훈 목사가 작곡한 곡에 이장하 목사의 노랫말이 담겨 우리나라의 많은 성도가 부르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도 《홀리네스 교단》이 찬송가를 개편하면서 박재훈 곡을 채택함으로 이 찬송은 한일 양국이 합작한 찬송가가 되었다. 

그 후, 「사사오」 목사는 「벅스턴」 선교사의 소개로 「나카다 쥬지(동경성서학원 창립자)」를 만나 1901년 《동경성서학원》의 교수가 됐지만 1913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국 순회전도를 하면서 복음 전도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4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던 「사사오」 목사는 과로로 인하여 46세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근래에 이르러 우리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게 되면, 집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는데 그때마다 예외 없이 가족이 부르는 첫 곡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서로 약속한 적은 없는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부르는 것이 불문율(不文律)이 되었다. 아마도 우리가 어린 시절, 우리 부부 양가의 어른들이 즐겨 부르시던 찬송이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교직에 처음 몸을 담은 곳이 1960년대 중반, 숭실고등학교였다. 당시 선배교사 중에 국어과 김희보(金禧寶) 선생이 계셨다. 그는 훗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1968년 오페라 「에스더」 극본을 썼고 이 극본에 박재훈 목사께서 곡을 붙이면서 두 분의 50년 우정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전해 들었다. 

두 분의 우정을 보고 들으면서 나는 한국장로신문 「신앙산책」 칼럼에 《박재훈*김희보, 두 분의 향기로운 우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는데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의 박재훈 목사께서 이 글을 보시고 손수 친필로 쓰신 답장을 보내주셨으니 나로서는 큰 영광이었다. 「큰빛교회」 행정 간사의 중재로 그 어른과 통화의 기회도 있었다. 그 어른께서 소천하시기 직전까지 ‘박재훈-김희보’ 두 어른이 작사와 작곡을 위해 생애의 마지막 예술의 혼을 불사르며 혼신의 힘을 쏟아내는 모습은 실로 감동적인 한편의 드라마였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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