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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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선교의 길, 국도 따라 이어진 복음의 여정

전라도의 삼총사

전라대리회에서 추천을 받고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했던 신학생들 중 유일하게 최중진만 전라도 출신이었다. 김필수는 경기도 안성 출신이었으며, 윤식명은 강원도 철원 출신이었다. 그러나 김필수는 1900년에 이눌서 선교사의 조사로 전주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윤식명은 배유지 선교사의 조사로 목포에 와서 목포선교부에서 활동했다.

물론 최중진도 최의덕 선교사에게서 전도를 받고 그의 조사가 되었으며, 그의 선교 구역인 김제, 정읍, 부안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에 임했다. 그리하여 최중진은 최초로 정읍군 태인면에 있는 매계리에 매계교회를 설립했는데 매계교회는 전주와 정읍을 잇는 국도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최의덕 선교사에게 단단한 신임을 받았던 최중진은 선교 사역에 필요한 말을 한 필 선물로 받아 그가 맡았던 선교 지역을 열심히 순회했다. 그래서 매계교회에는 해가 갈수록 많은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더욱이 매계교회 내에 매계학교를 설립해서 정읍 지방의 청소년들이 이 학교에 와서 새로운 학문을 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비록 학생들은 적었지만 이 학교의 설립자이며 동학과 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최중진은 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급속히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더욱이 1905년 일제의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국군통수권과 외교권은 이미 일본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일본의 실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남산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때 전국에 있는 뜻있는 젊은 청년들은 통감부 설치에 반대했으며, 구한말 군인들은 더 이상 부끄러워서 살 수 없다고 스스로 자결하는 군인들도 속출했다.

이러한 때에 매계학교에서는 철저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매일 실시하는 채플 시간에 최중진은 설교보다는 민족에 대한 훈화를 실시했다.

“학생 제군 여러분, 나라가 지금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럴수록 더욱 알차게 공부해서 우리 손으로 일본놈을 쫓아내고 다시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학생들 내 뒷목을 보시오. 이 상처는 일본 군인이 던진 칼에 의한 것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강연을 듣고 있던 학생들은 두 손을 꼭 쥐고 자주적인 나라를 설립해야 한다면서 스스로 굳은 결심들을 했다.

최중진은 매계학교만 돌본 것이 아니라 역시 정읍군 입암면에 있는 천원교회 내의 천원학교 일도 맡았다. 비록 학생수는 적었지만 학생들의 눈빛만은 빛이 났다. 그리고 매계교회와 천원교회 사이에는 한다리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여기에 한교교회와 한교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최중진은 한교교회 교인과 천원교회 교인들의 지원을 받아 정읍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계속 최중진은 자신의 선교 구역이었던 고창 흥덕에 흥덕교회도 설립했다.

흥덕은 ‘삼각지대로서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고창 읍내가 나오고 다시 남하하면 영광, 함평, 무안, 목포로 통하는 길이 있다. 또한 흥덕에서 북쪽으로 가면 부안 읍내가 나오고, 부안에서 계속 북쪽으로 진행하면 옥구와 군산 시내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흥덕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으로 진행해 가면 정읍이란 고을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북상하면 태안읍을 거쳐서 전주선교부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 길은 최의덕 선교사가 선교 여행길에 자주 다니던 길이었다. 그런가 하면 광주로 가기 위해 정읍에서 입암 쪽으로 향하다가 천원에 이르게 되면 전남 장성으로 빠져 나가는 국도가 있었다.

이렇게 최의덕 선교사는 국도를 따라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고 자신이 잠시라도 머물렀던 자리에는 꼭 교회를 설립했다. 그가 잠시 머물렀던 자리가 입암에 있는 천원이었으며, 고창 흥덕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최의덕 선교사는 정읍에서 전주로 가려고 하면 국도를 따라 들어가지 않고 금산사라는 절이 있는데 금산사 입구에서 전주로 돌아가는 지름길로 다녔다. 바로 그 자리가 김제군 원평면 두정리라는 곳인데 이곳 역시 삼각지대였다. 더욱이 두정리는 모악산을 끼고 있어서 선교사들이 주말이면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상놈이 먼저 장로가 되고

최의덕 선교사는 다른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주말에 모악산 밑에 자리잡고 있는 두정리 마을의 주막에 말을 맡겨 놓고 사냥길에 올랐다. 모악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짐승들의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 더구나 추운 겨울이 되면 산에서 마냥 뛰어놀던 토끼들이 먹이를 찾아 하산하는 일이 수없이 많았다. 이때가 되면 동리 아이들은 추위를 잊은 채 토끼몰이에 정신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 무서운 산멧돼지를 만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하산하는 멧돼지를 잡기 위해서 사냥을 즐겼는데 사냥을 하고 마을로 내려오던 중 뜻하지 않게 두 젊은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아! 선교사님은 미국에서 오셨지요. 저는 이 마을에 사는 조덕삼이란 사람입니다. 저 옆에 있는 분은 저희 집에서 일하는 마부입니다.”

“아! 저는 최의덕 선교사입니다. 오늘 모악산에 사냥을 왔다가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조덕삼은 뜻하지 않게 최의덕 선교사와 다른 일행을 만나 그냥 헤어질 수가 없어서 자신의 사랑채에서 최의덕 선교사 일행을 대접했다. 최의덕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로 알고 전도를 시작했다.

“조 선생님,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한 번 믿어 보세요.”

조덕삼은 최의덕 선교사의 그 정확한 한국어 구사에 감동이 되어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했다.

“저는 전주가 집입니다. 그러면 매주 주일마다 이곳에 와서 예배를 인도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덕삼의 사랑채에서는 어느덧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조덕삼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이란 젊은 청년도 예수를 믿게 했으며, 매주일마다 신도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이미 매계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하고 있던 최중진은 최의덕 선교사의 안내로 두정리 마을에 와 있었다. 이렇게 조덕삼은 두정리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정도가 되었으며 더욱 열심히 전도를 했다.

그런데 두정리 마을에서 동남쪽으로 올라가면 백제시대에 설립되었다는 유명한 절 금산사가 있었다. 그래서 원평면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금산사에 적을 두고 있는 신도들이 많았다. “아니, 조덕삼이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니 우리 동리에 예수당이 오면 망하는 것 아니야?”

이러한 말이 주민들 사이에 오가고 있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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