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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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방정식’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경영의 지혜 

탕감의 원칙, 손해보다 미래를 바라보다

효율적 선택으로 얻은 신뢰와 재기 기회

앞에서 말한, 부도 직전까지 가고 자칫하면 감옥에도 갈 뻔했던 위기를 겪은 후였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후에 겪은 고비들은 그때에 비하면 큰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만한 일로 죽지는 않는다. 감옥 갈 일은 아니다’라면서 툴툴 털어버릴 수 있었다. 내가 억울하게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는 저항하고 분노해봐야 별 소득이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럴 기운으로 상황을 극복하고 인내해 여유를 버는 쪽을 택하는 게 나았다. 위기를 당할 때면 주님께 의지함이 더욱 간절해지고 무릎 꿇는 기도가 열렸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날 방도가 찾아지곤 했다.

물론 사업을 하면서 당하는 위기가 늘 ‘전화위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패로 끝난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셀 수도 없다. 여기에는 실패를 극적으로 극복한 이야기를 주로 적긴 하지만 가슴 아픈 실패 스토리도 적지 않다.

지금이야 신용사회가 됐지만 1960~1980년대에는 그렇지가 못했다. 바로 어제까지도 탄탄해 보이던 거래처가 오늘 부도가 나 종적을 감추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매출의 5~10%는 거래처 부도로 결손이 나곤 했다. 이를 방지하고자 거래할 때 근저당 설정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거래처가 부도가 날 경우에는 근저당이 설정된 사장의 집을 경매에 넘기든가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는 그렇게 하기 전에 잠시 생각을 해보는 편이었다. ‘이만큼 손해를 봐도 회사가 망하거나 삶이 파탄 나는 것은 아니다. 손해가 날 뿐이다’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일단 속상한 마음을 내려놓고 안정감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부도가 난 회사에 채권단이 모일 때 직원들을 보내기는 하지만 받기 힘들다고 판단되면 “놔둬라, 우리 일에나 신경쓰자”고 했다. 그 돈을 받아내자고 소송을 걸고, 압류 넣고, 경매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민사소송을 낸 적이 없다. 건물 하나를 3억 원에 근저당해두고도 1천만 원만 받고 풀어준 것도 있다. 법적으로 진행하면 다만 얼마라도 더 건지겠지만, 복잡한 송사 절차에 시간을 빼앗기면 더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깨끗이 탕감해주고 상대에게도 재기할 기회를 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더 위로를 받았다.

이렇게 한 것은 상대가 불쌍해 보이거나 동정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나누며 사회에 환원하자는 등의 고상한 생각에 그런 것도 아니다. 그들의 고통을 모질게 외면할 수 없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단지 그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느니 생산적인 일을 하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여긴 이유가 더 컸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었고, 온 마음이 더 넓은 세상, 새로운 분야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 쉬운 선택을 한 것이 빚을 탕감해주고 다음 기회를 찾는 것이었다. 내 나름의 경영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런 선택은 경영전략으로도 유효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누 7:41-43)

탕감에도 원칙은 있었다. 그냥 통째로 없던 걸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방에게 “가져올 수 있는 대로 다만 얼마라도 가져오라”고 한 뒤, 1천만 원을 가져오면 9천만 원을 탕감해주는 식이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나는 은인이 된다. 그 사람이 재기해서 다시 거래를 하게 되면 좋은 거래 상대를 넘어 좋은 친구가 됐다.

이런 원칙으로 여러 차례 탕감해준 일이 있다 보니 전혀 얼굴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제 은인이십니다”라는 인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말 한마디를 들은 것으로 내 삶이 더욱 빛나는 것 같아서 탕감해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여겨졌다. 물론 우리 회사가 어려워질 만큼 타격을 준다면 그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큰 부담이 안 되는 범위들이라 가능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실패에도 익숙해져야만 한다. 도전과 실패는 바늘과 실처럼 늘 같이 다니기 때문이다. 실패를 극복하는 것이 성공이다. 성공의 길목에는 항상 실패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실패를 극복하는 것은 그 일에서 빨리 벗어나서 새 일을 시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실패한 일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워하는 것은 실패 속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빨리 탈출해서 새로운 일을 하면 어느새 실패는 지나간 사건이 된다. 실패의 두려움이 너무 크게 느껴지면 큰 바위에 깔리게 된다. 실패의 두려움의 크기를 확 줄여서 작게 보는 긍정의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작게 보면 정말 작아진다. 혹은 원래부터 작은 것을 너무 크게 생각해 두려움의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도 돌아봐야 한다.

나는 체념하고 새로 시작하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스승인 김 회장님에게서 배운 것이기도 하고, 실패한 자리에 앉아 뭉그적거릴 겨를이 없을 만큼 사업이 바빴던 때문이기도 했다.

일의 90%를 실패하더라도 10%의 성공으로 탄력을 받아 실패의 결손을 충분히 메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멘토 김 회장님의 지론이었다. 나는 실제로 사업을 하면서 경험으로 이를 체득했다.

나에게는 행복의 방정식도 있다. 가만히 앉아 성공도 실패도 없이 사는 것보다 90개의 실패 위에 10개의 성공의 싹을 틔우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이다. 10개의 싹은 1천 개의 결실로 맺어질 수 있다. 90의 실패를 후회하고 원망하고 아까워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하고 90의 실패의 경험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귀한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패한 직후라도 나는 여전히 행복한 사람일 수 있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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