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개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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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은 개천절이다. 이날 우리는 4천357년 전 민족국가의 탄생을 기념한다. ‘5.16 군사혁명’ 이후에 박정희 군사정부가 그때까지 써오던 단군기원 연호 대신에 예수 탄생을 근거로 해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서력기원을 채택해 오늘까지 서기로 연도를 표시해오고 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민족의 역사를 ‘반만년’ 또는 ‘5천년’으로 표현하면서 장구한 뿌리를 자부해 왔는데 국제관계에 한자리를 차지하면서 편의상 서기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4천357년 전, BC2333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는 분량도 작고 덜 알려진 고려후기 시가(詩歌)체 역사서인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이렇게 씌어 있다고 한다. 

“상제 환인(桓因)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환웅(桓雄)이라고 하였다. (환인이 환웅에게) 이르기를 내려가서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弘益人間)고 하였다. 이에 환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귀신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정상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그를 일러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 하였다. (단웅천왕은)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케 하여 남자 아이를 낳아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다. 단군은 조선 지역에 웅거하여 왕이 되었다….” 

후대의 사가들은 이때를 BC2333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음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제정했다. 이는 단군설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을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보는 역사인식을 따른 것이다. 

1945년 광복으로부터 3년 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며 ‘연호에 관한 법률’로 단군기원 즉 단기를 국가의 공식 연호로 법제화했고 이후 1949년 10월 1일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월 15일은 해방과 정부수립을 겹쳐서 기념하는 ‘광복절’로 명명되어 국가공휴일이 되었다. 지난 8.15 광복 79주년을 전후해서 때아닌 ‘건국절’ 논쟁이 정치권에서 벌어져 시끄러웠는데 야당은 1919년이 진정한 대한민국 건국의 해라고 하면서 1948년은 반쪽짜리 건국이었다고 강변한다. 

10월 3일 개천절은 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상징하는 의미는 있으나 신화에 기초한 것이어서 보다 현실적인 8.15 광복절에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더 큰 경축의 뜻을 함께 나눈다. 나라가 망하고 10년 세월을 이역만리에서 유리방랑하다가 힘을 모아 해외 임시정부를 세운 독립운동가들의 공로를 높이 기리지만 광복은 그로부터 26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독립은 민족의 자력 항쟁의 결과가 아니고 제국주의 일본의 2차대전 패전으로 얻어졌다. 일제말기 우리가 게릴라전이건 상륙작전이건 스스로의 무력으로 일본을 굴복시켰더라면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은 더 쉽게 정리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중국 땅에서 우리 광복군이 본토침공을 준비하는 중에 종전이 되어 그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광복 후에는 누가 더 독립에 공이 큰가보다 누가 더 일본을 섬겼는가를 따지는 목소리가 컸다.

정치영역에서 친일논쟁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오늘까지도 대한민국 건국이 어느 해였는가를 놓고 그야말로 쓸데없는 시비를 벌이는 모습을 국민들은 혀를 차며 바라보고 있다. 정부가 부인하는데도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 사람들은 1948년 건국절 제정 시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보며 그들에게 한가지 제안하고 싶어진다. 차라리, 10월 3일 개천절을 여야합의로 건국절로 이름을 바꾸고 건국기념일 논쟁은 이제 끝내라는 것이다.  

김명식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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