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남기고 간 이야기] 부르심에 합당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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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처럼 특별한 부르심, 전도자로서 특별한 임무를 받은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특별한 부르심은 없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믿는 자답게,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살면 그 삶 자체가 전도라고 생각한다. 

부르심에 응해서 헌신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자격은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게 자격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서 사랑이 없으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아무것도 아니다. 믿음도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학벌이니 기술이니 이런 것 없이 사랑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선교 현장에 갈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많이 배웠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헌금을 많이 했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복음 전하는 자의 자격 문제는 그 사람이 얼마나 겸손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인간적으로 어떤 심사 기구를 만들어서 선별하는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믿는다는 것 자체를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교 현장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아, 난 이런 것이 부족하구나’ 깨달으면서 고치는 과정을 통해 인성(人性)이 영성(靈性)으로 바뀌는 성화(聖化)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 이 땅에서 완전한 성숙이라는 건 있을 수 없지만 그 과정만큼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성실하게, 겸손하게, 충성되게 내 삶은 전적으로 주님께 드리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도 사람이 볼 때는 ‘저 사람 믿음 좋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저것은 거짓이야’ 할 수도 있다.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는 잘 알 수 없다. ‘교회생활 한다, 믿음생활 한다’고 하지만 어떤 긴박한 상황이 전개됐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잘보라. 나는 살아오면서 ‘아니, 어떻게 저 분이 저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하고 놀랐던 경우가 많았다.

믿음의 분량이 성숙의 척도이다. 그 성숙의 과정이 말씀에 나와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도하는가. 이것이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밟을 때,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선교 현장에서는 변수도 많고, 위험 요소도 많다.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역사하시지 않으면 언제 무슨 사고를 당해서 장애자가 될지 혹은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른다. ‘선교 현장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는 자주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감탄해 마지 않는다.

‘아,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간섭하실 수 있을까. 너무 너무 정확하다.’

‘저것이 만약 1초라도 틀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이동진료를 위해 산을 넘고 길을 걸으면서, 진료하고, 차를 타고 다니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수많은 위험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믿음의 확신을 준다. 그 느낌은 아무리 간증을 해도 듣는 사람이 ‘아, 그렇구나’하고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 가능성을 말하고 ‘아, 나도 가능하다. 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갈망 속에서 기도하면 반드시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고,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실 이유가 없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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