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보고 싶은 강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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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비하면 현대는 설교 풍년이다. 이제는 유명 목사의 설교를 안방에  앉아서 시청할 수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설교의 개념을 칼빈은 “성령께서 사람들의 입과 혀를 신성하게 사용하신다.” 루터는 “설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 바르트는 “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스페너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유명한 설교자라도 자의식(自意識)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된다. 담대한 마음으로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여종과 낯선 자들이 무서워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후에는 성령이 충만해 유대 대법원 앞에서도 담대하게 입을 열고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했다. 개신교의 예배에서 설교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예배와 설교, 기도와 찬양 속에서 자신은 아무 가치가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에서 1988년 18명과 함께 교회를 개척해  20여 년 만에 1만 3천여 명이 모이는 하비스트바이블 대형 교회로 이끌었던 제임스 맥도널드(J MacDonald) 목사의 말이다. “잠자는 시간 말고는 설교 준비를 한다”라고 했다. 그의 고백이다. “청중이 지루해 하거나 한눈을 팔면 설교자는 깊은 패배감을 느낀다. 성경적인 설교는 노력을 요하고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설교를 망치기는 너무나 쉽고 제대로 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설교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설교자와 회중은 설교를 통해서 변화하고 영적 성장을 한다. 성경적인 절박성과 열정을 담아 설교해야 한다.” 맥도널드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추구했다.

사역자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이다. 하나님께서 사역자들에게 명하신 것은 어떤 새 것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교정하고 다듬으라고 명하시지도 않으셨다. 그러므로 성경 자체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명한 설교 개요와 주제, 설득력 있는 논증, 감동적인 예화와 비유, 현실의 삶에 적용하는 조화와 균형이 있는 설교를 듣고 싶다. 세상 지식을 앞세우지 않고 성경 구절의 핵심 내용을 성경으로 자세히 풀어 주는 것이다. 이런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진정으로 듣고 영광을 경험하며 변화될 수 있다. 설교는 권위 있게 전해야 한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증(辨證)하지 말아야 한다. 변증(Dialectics)은 이성적 주장을 통해 따지고 분석해 진리를 확립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성경 저자보다 청중의 반응에 더 신경을 쓰는 태도이다. 변증은 얼핏 지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철학적 지식에 의한 설득력을 과대평가하고 성령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교자는 성경의 내용을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보고 싶은 강단이다.

예배(Worship)는 하나님  앞에서 땅에 이마를 대고 엎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마음과 지성, 감정과 의지까지 온 존재로 성(聖)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영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오직 성(聖) 삼위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 드린다.

자기를 자랑하며 자신의 권위로 말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놓치면 무슨 소용인가? ‘내가 볼  때’, ‘내 생각에는’, ‘내 견해는’, ‘내가 살핀 바로는’과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주범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내 시각(視角)이 아닌, 오직 하나님 말씀의 설교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다. 설교에 대해 박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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