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해병진해기지사령부 정훈참모실에서 근무할 무렵 민주공화당 신문을 받아보았다. 그 어머니가 낙태시키려고 간장을 일곱사발 마셨으나 그래도 태어난 아들이 박정희 대통령이라 했다. 일제시대인 1917년 11월 4일 선산에서 태어나다. 하나님께서 귀한 인물을 낳게 하신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구미소학교를 거쳐 대구사범을 1937년에 마치고 문경소학교 훈도(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마음에 뜻을 품고 만주군관학교에 고전 끝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해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소위가 되었다. 전투 경력도 없이 부대 안에 왔다 갔다 하다 중위에 진급하고 곧 광복을 맞았다. 군대 창설에 참여하고 한국육사 초기 입학해 대한민국 소위가 되었다. 평탄하게 소령 진급까지 했으나 여수 순천반란사건 이후 군남로당 숙청 작업에 연루되어 사형언도까지 받았으나 군 고위 장교들의 추천으로 생명이 유지되고 6.25사변이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되어 전선에서 공산군을 막았다. 자유당 시절 소장진급까지 되어 제2군 부사령관 근무 때 육사 8기생 중심으로 군사정변 혁명을 도모해 4.19 학생혁명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역사적인 5.16 쿠데타에 성공했다. 반공과 구악일소 중심의 혁명공약 6가지를 내걸고 3년 군사정치 후 대장까지 승진한 계급으로 1963년도 8월 예편했다. 민주공화당을 만들고 대통령에 출마해 5대 대통령으로 당선 후 과감한 정치 실적을 높이 쌓았다. 유신체제 비판 속에 9대 대통령까지 역임했다. 박 대통령은 농촌 잘 살기운동을 위해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을 부르짖었다. 새마을운동의 이념과 목표는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고 농촌의 근대화,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 국민의 의식개혁을 그 목표로 삼았다.
새마을운동 실천을 위해 박 대통령이 처음 지은 새마을노래 가사는 농촌 근대화에 치중한 내용으로 6절까지 스스로 짓고 작곡하여 방송으로 전 국민이 듣고 동참하게 했다. 1절 가사를 살펴보자 1절: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후렴 살기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 가사 내용처럼 우리 농촌은 차와 농기구가 전기 밝은 마을 집마당까지 드나들어 큰 도로망에 직접 연결되어 살기 좋은 농촌문화환경을 이루었다. 모여서 건설적 생산적 토론까지 해 우리 민주 자주 국민사상도 거뜬히 향상되었다.
이 새마을운동은 도시에도 전개해 기업인 사원들이 서로 화합해 생산실적을 높여 넉넉하게 살게 되었다. 70년대 나는 남녀고교생을 몇 명씩 인솔하고 강원도 횡성 덕초현 마을에 찾아가 어린이 지도와 농민들에게 소득증대와 협동정신의 새마을정신 교육도 실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지도자 교육을 위해 그 운영 계획을 당시 가나안농군학교 교장 김용기(1912-1988) 장로에게 ‘가나안 복민의 생활 헌장’의 교육 내용을 참고하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한강의 기적’을 이룬 공로로 오늘 우리나라가 세계 10위 경제대국 부자나라가 되고 수출도 5위 국가로 올라 있다.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써서 1969년에 걸어 42년이 되었다. 지금 한자패거리 때문에 한자현판이 시대역행하고 있지만 박 대통령 한글정신도 살아날 것이다. 세계 70개국에서 새마을정신을 배워갔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도 되어있다. 별세 후 비자금 하나없는 박정희 대통령을 일본 대학생들이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불행하게 1979년 10월 26일 부하의 흉탄에 별세해 영부인 육영수(1925-1974) 아내와 서울 현충원에 주무시는 박정희 대통령 45주년 추도일이 다가온다. 새마을정신으로 나라 겨레 빛내주신 우리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며 감사한 마음도 드리자.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