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최봉석 목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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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의 역사 일어나

‘예수천당’ 말 한마디…위엄과 힘 있어

교장은 최권능 조사에게 졸업장을 주기 위해 교수들을 설득했고, 결국 최 조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최 조사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이 교수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장로회 사기》를 보면 1913년 최권능 조사가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기록이 있다. 후일 보수신학의 본체인 총회 신학대학 학장이 된 박형룡 박사는 7세 때부터 14세의 소년이 될 때까지 벽동교회에서 자라서 최봉석 조사가 목사가 된 후까지 있다가 그에게 학습을 받았다.

1913년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다음 해였다. 이 해에 장로회신학교 제6회 졸업생은 34인이었다. 그중에는 총회장을 지낸 분이 두 분이나 있었다. 김선두(7회), 김영훈(16회) 두 목사였다. 그중에는 산동 선교사 김영훈, 사병순이 있는가 하면, 계효언 목사의 아버지 계리영 목사가 있었다. 그중에 화제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최봉석 목사였다.

최봉석은 졸업한 그해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벽동읍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해 1년간 시무했다. 1914년 평북노회 전도부에서 최성주 목사와 함께 만주지방 전도목사로 파송받아 만주로 가서 봉천성 통화현을 중심으로 남만주 지역에 전도를 시작했다.

만주에 와보니 불쌍하게 사는 농민들의 형편이 심각했다. 강냉이 한 가마니에 딸을 파는 부모가 있었다. 우리 동포들도 긴 겨울 동안 노름과 술타령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형편은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당시 남만주 철도를 수중에 넣은 일본 군대가 만주에 들어와 있었다. 이 무렵 만주에 와서 사는 우리 동포 중에는 마적들과 싸우기 위해 총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최 목사는 길을 가다가 무엇이 어른거리기만 해도 “예수!”라고 외쳤다. ‘예수’라는 말만 해도 중국 사람들은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사람들의 골수를 쪼갰다. 그에게는 남들이 지니지 못한 비상함이 있었다. 마치 유대 땅에 여호와 하나님을 외쳤던 예레미야가 서 있는 듯했다.

그의 외침은 영혼을 울리는 뇌성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곳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를 통해 만주 전도의 불이 댕겨졌고,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예수천당!”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위엄과 힘이 있었다. 그는 1923년 남만주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같은 해 남만주 노회에서 개척전도 공로 표창도 받았다.

그는 목사 안수 후 위임목사로 부임한 벽동읍교회에서 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명이 전도하는 것임을 잊지 않고 떠났다. 만주에서도 한 교회를 개척하면 지도자를 교육해서 세우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마치 서부활극에서 주인공이 한 마을에서 악당들을 제거하고 그곳에서 편히 살자고 해도 기어이 그곳을 떠날 때와 같이 그의 뒷모습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었다.

어느 날 최 목사는 사람들이 모인 데를 찾아가다가 ‘타향살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고향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고, 제2의 고향인 삭주를 떠난 지도 12년이 되었다. 

그동안 50개의 교회를 세웠다. 삭주에는 둘째 아들과 딸 광옥이가 있었다. 대동강과 가족의 얼굴도 보고 싶어졌다. 큰아들 내외는 만주에 남기고 최 목사는 귀국했다. 삭주의 집을 팔고 고향인 강동으로 이사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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