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한 삶과 믿음 이야기] 뜨거운 가슴을 열고 (1)

Google+ LinkedIn Katalk +

얼마 전 토요일 오후 2시. 개포동에 있는 남서울중앙교회에 갔다. 그곳에서 지인 가정에 결혼식이 있어 참석했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죽마고우를 만났다. 참으로 반가웠다. 

친구는 “수개월 전 대구 친척 집에 갔을 때에 그 집 서재에서 자네 수필집 『그 큰 아픔이 사랑이런가』가 꽂혀 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펴 보았다”며, “그 책 중에서 「멋진 인생」이란 제목의 글을 읽었지. 너무 진솔한 이야기이기에 자네를 잘 알면서도 그 글을 끝까지 다 읽었다네. 자네 사촌 형수님과 대화 내용이 적힌 글 말일세”라고 했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내가 가사 일을 돌보지 않으면 가정이 지탱해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지병으로 앓고 계셨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 수발하기도 벅찬데 밭농사를 맡아 지셨다. 힘센 노동이 필요한 논농사는 내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었다. 우리 집 농토는 논 600평과 밭 500평이 전부의 토지였다. 여기서 1년간 생산된 곡물로 가정 경제를 이끌어 갔다. 아주 소량의 농토에 인건비를 드리면 완전 적자였기에 자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1년간 논과 밭에서 생산된 곡물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논에서 생산된 쌀은 7가마와 밭 곡물 전체를 쌀로 환산할 때 5가마 정도였다. 1년간 농산물 총 생산량은 쌀로 12가마 정도이니 이를 현금화한다면 현재 백미 80키로 1가마당 25만 원으로 환산할 때 12가마의 값은 300만 원이다. 이 금액이 1년간 우리 식구가 먹고 입고 생활하면서 아버지 약값까지 지불했는데 당시 물가 상황은 다르지만 인건비를 들이면서까지 농사를 지을 수는 없었다.      

사촌 형수님이 저의 가정 형편을 잘 아시기에 원정차 찾아갔다. “좀 따분한 말씀인데 들어 주시겠어요?” “아무렴요. 말씀해 보세요.” 내 속맘을 털어놓았다. “저는 가정을 따르자니 장래가 울고, 장래를 따르자니 가정이 웁니다. 이런 실정인데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저의 장래도 열리고 가정도 풀릴까요? 저의 집 형편을 볼 때 제가 살림을 돌보지 않으면 도저히 지탱해갈 수 없겠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제가 지금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  

나의 말을 다 들으신 형수님은 “도련님” 하고 나를 부르신다. “지금 한 말씀을 수일 내에 작은 어머니를 뵙고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도움 될 말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형수님, 저의 말을 잘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어줄 분이 없다고 여겨왔었는데 오늘 말씀을 드리니 정말 행복합니다.” 이렇게 인사를 드린 후 일어섰다.

사촌 형수님과 대화를 나눈 며칠 후였다.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신다. “요일 전에 돌고지(지역명) 네 형수로부터 너의 이야기를 잘 들었다. 그간 네가 공부하기도 힘든 시간인데 농사일까지 돌봐주었기에 가정이 유지되어왔다. 네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마치 젖먹이 어린 애가 부모를 의지하듯이 너를 그렇게 의지해 왔단다”하시면서 어머니가 먼저 제안하셨다. “너희 형처럼 서울로 멀리 가지 말고 전주쯤 가까운 곳이면 어떻겠느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병환에 계시고 어머니가 노래(老來)에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성경 룻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의 의미는 다르지만 분명히 저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계속>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