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권위 없는 총회장, 한국교회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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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추기경이나 불교의 종정(宗正)의 이미지에 개신교 총회장을 빗대어 말할 수 있을까? 한 종교를 대표하는 영적 수장으로서 개신교의 총회장은 언제부터인가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목사나 교인들조차도 머리 숙여 예를 갖추고 싶은 권위의 대상이 아니다. 개신교는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 실종된 시대를 맞고 있다.

초기 한국기독교를 이끈 어른은 길선주 목사였다. 그는 평양대부흥운동을 주도했고, 그가 있었기에 1909년에는 ‘백만명구령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으며, 삼일운동에도 기독교가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에 기독교를 이끈 어른은 이자익 목사였다. 그는 장로교단의 분열 이전에 총회장을 세 번(13, 33, 34회)이나 역임했는데, 이는 권모술수나 조직을 동원한 선거운동을 통해 얻은 결과가 아니다. 이자익 목사는 총회장이 되는데 빚진 사람이 없었기에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어떤 인물이나 집단과도 정치적인 거래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사심 없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혼돈의 시기인 1947년과 1948년 연거푸 총회장에 추대되어 한국교회를 이끌었다. 

6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를 이끈 어른은 한경직 목사였다. 그는 바른 목회자 상(像)과 덕장(德長)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기에 기독교 안팎에서 존경을 받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 움직였고, 그가 건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외부의 세력이 감히 기독교를 폄훼하지 못했다. 그의 주도로 개신교 전체가 연합해 1973년 빌리그레함 전도대회를 열었고, 기독교 학교들의 설립과 군복음화와 사회복지사업과 반공 운동이 큰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길선주, 이자익, 한경직 목사의 공통점은 리더의 자리에 군림해 교황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님 앞에 자신을 노출해 죄를 성찰하며 진실한 신앙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길선주 목사는 마룻바닥을 구르며 남을 미워한 죄를 회개했다. 이자익 목사는 총회장에 선출된 후 밤새도록 예배당에 무릎 꿇고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고백하며 기도했다. 한경직 목사는 템플턴 상을 받는 영예를 얻고도 신사참배를 회개한다고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어른의 권위는 진실에서 나오며, 진실은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이 난세에 총회장은 많으나, 머리 숙여 존경하고 싶은 어른이 실종된 한국교회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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