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속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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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혜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멸망의 운명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죄인된 자기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함을 알아야 하나님의 구원을 찾게 된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죽음의 공포에 압도된다.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게 된다. 자신의 더러운 상태가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성경은 말씀한다.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룹(Cherub. 수호자, 천사)들조차 두려움으로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었다. 후패(朽敗)한 인간은 버러지와 같다. 하나님 앞에서는 지상의 빛나던 것들까지도 어두워진다. 칼빈은 “진정한 종교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이라고 한다. 이 지식에  비추어 생각하면 ‘인간 생활의 최고의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런 신앙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게 된다. 이 경외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경건’하게 된다. 경건(Piety)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열심이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善)의 근원이시며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소망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 있다. 나의 모든 행복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세세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엄숙한 두려움과 경외심은 예배를 뒤따르게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평소에는 종교를 무시하던 사람도 천둥이 우렁차게 울리고 벼락이 소리치면 무서워한다. 이 자체도 우리 속에 심어진 하나님 인식의 증거이다. 누구에게나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힘보다도 강하고 예리하다.

루터는 “명백하게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근접할 수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만을 확고히 붙든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위엄 가운데 계신 절대자 하나님”이라고 했다. 라테란(Laterann) 공의회는 “하나님은 형언(形言)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공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를 하는 분들 중에 가끔 기도를 시작하면서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을 본다. 이는 안 될 말이다. 기도는 위대하고 장엄하신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드러내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불러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 옳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의 구원자,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영광과 감사와 은혜의 우리 아버지 하나님, 거룩과 두려움, 경건함으로 불러 드려야 한다. “사랑과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얼마나 아름다운가!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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