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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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상처, 신앙 안에서 치유하다

관리 소홀의 과오 인정… 나아감의 원천

싸움서 물러서며, 더 큰 기회 찾아 나서다

사업을 하면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나쁜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회사의 정보와 재고를 빼돌리거나, 장부를 속여 개인적으로 유용하다가 자기 회사를 차려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역시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았다. 관리 소홀의 과오를 빨리 인정하고 다음 대책을 찾는 것이 더 급하다고 여겼다. 다툼 자체가 기회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계산법이었다. 이것 역시 천사 같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나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방법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생산성 없는 짐은 빨리 내려놓아야 다음 행동이 자유롭다. 원가가 많이 들어간 실패작일수록 재고를 빨리 결손 처분하는 것이 짐을 더는 길이다.

밤낮없이 바쁜 사업 일정 속에서 지쳐 있다가도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학교에서 동료 교사들과 함께 제자들을 가르치고, 찬양과 기도를 했다. 거기서 참다운 휴식을 얻었다. 갈등과 분노와 원망이 흐르던 사망의 골짜기를 탈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흔히 교회에서는 경건히 예배드린 뒤에 세상에 나가서도 경건하게 살라고 한다. 그런 순서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살다 보면 그 반대의 순서일 경우가 더 많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지친 몸을 이끌고 교회에 와서 위로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어도 예수 잘 믿는 것이다. 사는 것이 팍팍할수록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싸움으로 못 이길 때 이기는 방법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참으로 신기한 점이 있다. 험한 세상에서 85여 년 세월을 사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누구와 싸움을 해 본적도 없고, 때리거나 맞아본 적도 없다. 특히 주먹질하면서 치고받으며 싸워본 적이 없다. 굳이 꼽아보자면 학교 다닐 때 깡패들에게 맞아본 일, 군대에서 단체기합을 받으며 선임들에게 맞아본 것이 전부였다.

싸움에 휘말린 적이 없는 것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 싸움에서 잠깐 밀리더라도 내 인생이 지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어 피했기 때문이다. 굳이 싸움으로 해결할 일 없이 팔십 평생을 살아온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다.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창 26:21-22)

이삭은 생명처럼 귀한 샘을 파놓고도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순순히 옮겨간다. 싸움을 피한 뒤 또다른 우물을 팠다. 김위찬 교수가 쓴 <블루오션 전략>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삭이 ‘블루오션’을 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회사나 다름없었던 김 회장 회사의 부도는 내게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앞에 쓴 것처럼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부장교사가 됐던 시점이라 온몸을 던져 그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했고,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오히려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다. 절박한 위기의 언덕을 넘으면 기회의 꽃이 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이때 체득했다. 사건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겁도 나고 고생스러웠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독립적인 사업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해준 특별한 사건이었다. 사실 그전에는 경영 사장이긴 했어도 김 회장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편안한 위치였다. 이후 김 회장이 일선을 떠나면서야 완전히 책임을 지는, 자타가 인정하는 기업가가 된 것이다.

마치 군인이 처음 실전에 투입되면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르지만 곧 훈련받은 상황들이 기억나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나도 곧 기업가의 역할에 적응했다. 잘 모르는 일에 부딪치면 ‘이럴 때 김 회장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그분이 옆에 계신 것처럼 혼잣말로 그분과 대화를 하면서 해결책을 찾곤 했다. 그러면 자신감이 생겨 그동안 훈련을 통해 쌓아온 능력과 기(氣)가 되살아났다.

1990년 중반에는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국내 섬유업계 전체에 닥친 변화였다. 외국 원단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의류 직물 생산회사들의 판로가 서서히 줄어든 것이다. 또한 국민소득 3천 달러 미만일 때는 대체로 유행을 따라서, 남들이 입는 옷을 그대로 입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남이 입는 옷은 안 입는 패션 경향이 생겨났다.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가 필요해진 것이다. 때문에 개발비가 몇 배로 들고 재고가 많이 생겨 수익성이 점차 떨어졌다. 이 영향으로 동종업계의 많은 섬유 회사들이 쇠락의 길을 걸었고 종내 사업을 접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미리 하나의 사건을 겪은 덕분이었다.

1992년쯤이었다. 여성 원피스 소재로 면 100% 목공단을 생산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원단 표면에 실크 같은 광택을 내고 부드러운 감촉을 살리려면 일종의 다리미 원리로 가열하는 ‘카랜더 릴 롤러(줄이 간 대형 롤러)’ 공정이 필요했다. 생산 공장에게 이 설비를 일본에서 수입해 설치하도록 해서 시험가공을 한 결과 성공적이었기에 ‘영국 로열풍’이라고 불리던 큼직한 장미꽃 무늬가 들어간 최고급 원단 생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새로 설치한 기계를 처음 사용하다 보니 상당한 양의 불량품이 나왔다. 열 조절이 잘못돼 뻣뻣해져 버린 것이다. 원래 목적했던 여성용 원피스, 투피스의 옷감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큰 타격이 될 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불량품 원단을 어떻게 처리할지 난감했다. 1년쯤 창고에 넣어뒀다가 동대문종합시장에 새로 낸 판매장에 내놓아보았다. 신축한 동대문종합시장은 기존의 광장시장과 달리 원단 시장이 채 형성되지 않았을 때여서 재고와 덤핑 물건이 주로 취급됐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 원단을 내놓아보았던 것이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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