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 시대의 ‘장로다움’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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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혼란스럽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마다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통곡소리처럼 들리는 이즈음이다. 나라 바깥은 전쟁과 갈등이 점점 더 확산되는 추세이고 그 와중에 무고한 민간인, 특히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올 여름 폭염을 겪으면서 기후난동을 피부로 체감하다 보니 이 위기가 큰 재난으로 번지게 될 가까운 미래를 염려하며 불안해하는 모습들이다. 경제적 형편이 어렵지 않을 때가 별로 없었던 기억이지만 이즈음 자영업자들의 볼멘소리가 예사롭지 않고 수많은 청년들이 무직 상태로 전전하거나 일용직 아르바이트 일로 간신히 일용할 생계를 버는 형편이란 소식은 비애감을 더한다. 

혼탁한 시대일수록 진리의 빛을 비추는 세상의 파수꾼으로 본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교회는 코로나 파동 이후 좀처럼 제 몸을 추슬러 도약하질 못한 채 여러 면에서 무기력증을 드러내고 있는 게 객관적인 현실이다. 유년주일학교를 비롯해 젊은 세대 구성원들이 교회를 떠나는 추세가 심상치 않아 머잖아 한국교회가 경로당 분위기로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높아만 간다. 내부적으로도 교단별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진단과 대책을 내놓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실효를 거두어 교회를 상큼하게 갱신했다는 뉴스는 가뭄에 콩나듯 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반면 잊을 만하면 온갖 부끄러운 추문과 험악한 뉴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여기저기 오염 물질을 뿌려대니 교회의 대사회적 신뢰도는 감감히 추락할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교회는 오래된 고질적인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면서도 탄식만 연발할 뿐 그것을 화끈하게 해결해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자정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 그 공백을 습관적인 반복 의례처럼 정기적인 예배와 대형 군중집회의 이벤트성 행사로 채운들 그것이 문제의 본질을 짚어 구조적인 해법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 이러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의 한복판에서 나는 장로다움이란 말을 떠올려본다. 교회에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는데 그 중심을 잡고 건강한 생존을 도모하며 그 살림과 제반 행사가 두루 거룩하고 보편타당하게 하나님의 공의의 수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한 공동체를 견인하는 주체는 그 내부의 창조적인 소수다. 그중에서도 장로는 그 삶의 경륜과 지혜를 통해 공동체의 위기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활로를 뚫고 하나님의 권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 

구약성서 시대 장로는 한 공동체의 덕망을 표상하는 최고 연장자로 그 제반 운영의 책임을 담당하면서 최종적인 권위를 담지한 지혜의 주인공이었다. 반면 신약성서 시대에 장로는 그 원어(presbeuteros)의 함의대로 공동체의 전후좌우 구석구석을 두루 살핌으로(presbeuo) 조화와 균형을 갖추어 잘 발전해갈 수 있도록 다스리는 리더였다. 공동체의 어느 지체, 어느 부분에 그늘이 졌는지, 어떤 결핍과 문제가 있는지 폭넓게 조망해 살피되 정확하게 사안의 핵심을 통찰해 그 문제를 해결하는 추동력을 발휘하는 리더십이 장로들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에서도 장로를 ‘다스리는 자’로 규정해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훈계했고 특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에게 더욱 더 그리하라”고 권면했다.

  한편 오늘날 장로교회의 장로는 대의정치의 주역으로 교회 성도의 다양한 구성원을 대변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정치를 담당하는 직분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야 마땅하다. 미국장로교회에서 20대, 30대 장로, 상당수의 여성 장로들이 배출되어 공동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장로교 본연의 대의정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제도를 운용하는 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아울러, 치리하는 일반 장로(ruling elder)와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로서 목사직을 구별해 당회를 조직하도록 한 것도 디모데전서의 상기 말씀에 근거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공동체는 물론 우리 사회와 국가 전반에 걸쳐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기준으로 정치 감각을 발휘해 사사로운 당파적 카르텔의 이해관계와 ‘정치 브로커’로서의 장로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진정한 장로다움이 우리 시대에 역사하고 있는가 의문이다. 그저 카리스마적 목사 1인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맹종만 하는 장로, 반대로 힘없는 목사를 바지사장쯤으로 여겨 조종하고 억압하는 장로, 노회나 총회에서 돈과 권력의 흐름을 쫓아 이합집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기준에 역행해 이권정치에 물든 장로… 이러한 초상화는 장로다움의 가치와 거리가 먼 세속의 야바위꾼과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은 구름과 바람의 징조를 보고 기후를 예측하면서 이 시대의 징조를 보고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현 세대의 둔감한 의식을 질타하셨다. 우리 교회의 예언자적 의식을 양산하는 요소 가운데 목사는 물론 장로다움의 리더십이 실종되어 버린다면 교회는 물론 우리 사회에 참신한 희망을 키우기 어렵다. 인습적인 종교 행위로 동종 교배하는 끼리끼리의 정치적 야합만이 판을 칠 뿐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이 나라와 사회의 총체적인 위기 국면이 그 명확한 증거 아닌가. 예전에 한참 가난하던 시절, 작은 교회일 망정 그 공동체의 장로 한 분이 자신의 한평생 살아온 신실한 삶 자체로 예언의 메시지를 드러내던 현장이 그립다.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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