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발이 묶여 있습니다. 폭탄은 여기저기서 터지고 머리 위로는 수시로 미사일이 날아가고 있었죠. 벌써 2시간 전부터 그는 거리에 서있는 빨간 차 한 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방공호에 피신해있던 그는 상황이 악화되자 「키이우」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차량도, 휘발유도 구하기 어려웠죠.
그때 눈에 띈 것이 난장판이 된 도로에 서 있는 빨간 차 한 대였습니다. 시동장치에는 열쇠가 꽂혀 있었고, 기름도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마치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대기 중인 차량처럼 보였습니다. 지켜보던 그는 자제력을 잃고 그 차를 자신이 몰고 가기로 결심합니다. 이대로는 수시로 터지는 폭탄에 가족이 몰살을 당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끝내 차량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그는 남의 차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훔쳐 타고서 가족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키이우」에서 남서쪽으로 200㎞ 떨어진 「빈니차」에는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었습니다.
무사히 「키이우」를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그는 차를 몰고 가는 내내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가 차를 훔친 탓에 누군가 「키이우」를 탈출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차를 뒤진 끝에 차안의 ‘소형트렁크(글로브 박스)’에서 차주의 전화번호를 찾아냈습니다. 그는 다이알을 돌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 차를 훔쳤어요.”
차 주인의 첫 마디는 뜻밖에도 “하나님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차주는 머뭇거리는 그에게 “걱정 마세요. 내게는 차가 4대가 있었고 우리 가족들은 그중 한 대인 지프차로 이미 탈출했습니다”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나머지 차 3대에는 기름을 채우고 열쇠를 꽂은 채로 각각 다른 장소에 세워뒀습니다. 차안의 ‘소형트렁크’에는 내 전화번호를 남겼고요. 나머지 3대의 차량에서 연락이 왔어요. 곧 평화가 올 거예요. 몸조심하세요.”
차 주인은 누군가 차를 몰고 가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겁니다. 누군가 차를 가져가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를 탈출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아주기를 소원해서 전쟁 없는 세상을 다시 만나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이 사연은 「우크라이나」의 전직 외교관인 「올렉산드르 셰르바」가 지난 5월 2일 빨간 차량의 사진과 함께 내용을 트위터에 공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차를 훔친 이가 누구인지, 또 차량주인은 누구인지, 그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지 아무 것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끔찍한 학살과 죽음의 참상(慘狀)은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름 모를 「우크라이나」 차주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감동적인 희망을 줍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죽고 죽이는 전쟁을 계속하지만 그런 절망 속에서도 세상에는 누구라도 반드시 살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천사’가 있습니다. 생명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지옥 같은 도시 곳곳에 기름을 채운 차들을 세워둔 그 「우크라이나」 시민 같은 사람이 바로 ‘천사’입니다. 이런 천사들이 있는 한, 인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자동차 4대를 소유한 차주가 자신은 찝차(Jeep)로 가족과 함께 탈출하면서 나머지 세 대의 자동차에는 기름을 가득 채워놓고 자동차 시동장치에는 열쇠까지 꽂아 놓다니요? 이것은 꾸며낸 소설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사일이 날아오고 여기저기에서 폭탄이 터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 보통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 순간, “아, 그랬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남의 자동차를 몰고 가는 사람이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를 받은 차주의 첫 마디가 “하나님 감사합니다”였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차를 훔쳐 달아나는 사람이 ‘죄책감’없이 안도(安堵)할 수 있도록 차 안에 메모를 남긴 그는 하늘이 내려 보내주신 ‘천사’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절로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이런 귀한 ‘천사’를 만나게 하시니 감사, 감사합니다. 우리마음속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