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도의 문학산책] 작가 이광수의 빛과 그늘 (中)

Google+ LinkedIn Katalk +

허영숙 여사•막내 이정화 교수와의 인터뷰

내가 작가 이광수의 부인 허정숙(許英肅) 여사를 인터뷰한 것은 1970년 전후였다. 효자동 집으로 찾아간 날, 마침 미국에서 귀국한 막내 따님 이정화(李廷華) 여사와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허 여사의 자택에 이르렀을 때 이정화 여사와 그의 남편 아이엥가(인도) 박사와 어린 자녀 세 식구를 만나게 되었다. 잠시 응접실에서 인사를 나누고 이 여사가 내게 “우리 사진찍으러 가요”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세 식구가 외출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내가 근무했던 현대경제일보(현 한국경제신문) 조사부에 이 인터뷰 기사를 확인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해 찾기 어렵다는 전갈이다.

허 여사를 인터뷰한 기사가 나간 다음 기사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며 허 여사께서 편집국장에게 항의하는 전화를 한 것이다. 그 일로 나는 편집국장에게 불려가서 질책을 받았다. 내용인즉 막내 따님이 외국인과 결혼한 것도 마음에 걸리곤 했는데, 인터뷰 기사엔 큰 따님도 외국인과 결혼했다는 부분(필자의 착각이었음)에 화를 참지 못하고 전화로 항의해 온 것이다.

그후 50여 년 만에 이정화 여사를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미국 버지니아주 포토맥 포럼(이영묵 대표) 서울 심포지엄(송현호 교수 주관)에 참석해 50여 년 만에 해후한 것이다. 이날 모임에서는 이광수 기념사업을 위한 논의도 있었다. 

이정화 교수가 월간조선(‘24. 6.)과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적에 본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의 친일 문제, 6.25때 인민군에 끌려가던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자신이 일곱 여덟 살 무렵, 아버지가 정란 언니에게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원문으로 읽으며 번역하는 등 소설책으로 영어 공부도 함께 했다고 회상한다. 자신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이화여고 재학시에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가 주최한 세계 학생토론대회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참석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전 춘원학회 회장 송현호 교수(아주대)의 증언에 따르면 춘원의 재판기록에 춘원의 수양동지회 사건 최종심에서 검사의 질문 한 대목을 상기시킨다. “네가 황민화를 이야기하고 창씨개명을 이야기 했는데~ 결국 네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민족운동이 아니었느냐?”라고 물은 것이다. 

춘원은 일제에 협력 행각으로 반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그는 창씨 개명에 앞장서고 지원병제를 찬성 적극 독려하는 등 일본 황민화 정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 같은 행적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청산이라는 관점에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또 현 춘원학회 회장 방민호 교수(서울대)는 춘원이 일제에의 협력에 대한 문제를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치호가 잡혀가 죽고, 이광수도 죽느냐 사느냐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있었던 상황’인 당시의 ‘구조적 폭력이라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 사태임을 참작해야한다는 견해이다.

(계속)

이정화 교수와 함께

박이도 장로

<현대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