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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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덕 선교사의 사역과 최중진 목사의 자주교회 사건

비록 늦은 결혼이었지만 그들은 이상과 꿈에 가득 차 있었으며 두 사람이 힘을 모아 호남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시키는 일에 소망이 가득했다. 

이들은 1개월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다시 사역의 장소인 전주로 돌아왔으며 그동안 결혼으로 정신이 없었던 최의덕 선교사는 다시 선교현장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추천을 받아 공부하고 있던 김필수, 윤식명, 최중진도 어느덧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금산 두정리교회에서 이자익 장로의 신앙으로 잘 지도받았던 조덕삼 집사와 왕칠순 집사도 모두 장로로 피택을 받고 드디어 최의덕 선교사의 집례로 장로 장립을 거행하게 되었다.

한편 두정리교회는 15리나 되는 원평리에서도 교인들이 출석했기에 최의덕 선교사는 이자익 장로를 원평교회로 파송하고 그곳에서 교역을 하면서 신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가 하면 왕칠순 장로는 가까운 순창 지방으로 이거해 순창교회를 이끌어 갔다. 그렇게 최의덕 선교사는 자신이 지도했던 일꾼들이 속속 지도자로서 성장한 일에 남다른 기쁨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1909년 가을은 더 큰 하나님의 은총이 호남 땅에 머물렀던 때이기도 한데 최중진, 김필수, 윤식명이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 뜻깊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전북·전남대리회의 장로 대표로 평양에서 모이는 독노회에 참석했으며, 첫날 개회가 끝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로는 목사 총대로서 그 노회의 회원으로 참석했다.

인사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최중진 목사는 매계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정읍, 부안, 고창 지방 일부를 맡아 당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김필수 목사는 그동안 전주 서문교회 장로로 오랫동안 시무를 했지만 군산 지방 교회들이 활발하게 성장하자 군산 개복교회 당회장으로 임명을 받으면서 구암교회, 지곡교회 등의 당회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윤식명 목사도 최초로 목포교회의 청빙을 받고 위임목사로 시무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배유지 선교사의 모든 구역의 당회장도 떠맡게 되었다. 이렇게 일꾼이 배출되었을 때에 최의덕 선교사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최중진 목사가 난데없이 자주교회를 선언해 큰 충격을 주었다.

충격에 놀란 최의덕 선교사

최중진 목사의 자주교회 사건은 그가 맡고 있던 당회 구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가 시무하고 있던 매계교회를 비롯해서 부안, 정읍, 흥덕, 임실 등 여러 교회가 그를 따랐다. 흔히들 이 사건을 1910년 자유교회사건이라고 말한다.

최중진 목사는 전주나 군산 지방에 갈 때마다 자신의 구역에도 미션학교와 미션병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남달리 강했다. 그래서 그는 1910년 1월 초에 전주에서 모이는 전북대리회에 아래와 같은 이유로 불참통지서를 발송했다. 그리고 다섯 가지를 요청하면서 이 중 한 가지라도 협력해 주지 않으면 대리회에서 탈퇴하고 자주교회를 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 다섯 가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원입교인에 대한 현 교회의 규율이 엄격하니 이를 폐지하고 학습인을 세워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도록 할 것.

② 군산 지방을 편입시킨 부안 지방은 나의 지역에 되돌려 줄 것. 그리고 고창과 무장도 가능하면 내게 맡겨 줄 것.

③ 나의 지역에 중등학교 하나를 세워 교육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

④ 교회마다 구제부를 두어 그 위원으로 하여금 가난하고 어려운 백성을 구제토록 할 것.

⑤ 집 한 채를 사주어 선교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없도록 할 것.

대리회에서 이 다섯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최중진 목사는 자신이 맡고 있던 전 구역의 교회와 함께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대리회에서 탈퇴하고 자주교회를 선언했다. 그런데 그를 아꼈던 최의덕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아 귀국했기에 그의 권면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한편 그와 가까운 동료들과 선교사들이 설득했지만 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전북대리회에서는 그를 면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남북대리회는 힘을 모아 전라노회 조직에 힘을 기울였고 바로 1911년 9월 18일 대구에서 만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의 결의로 7개 대리회가 모두 노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0월 15일 전주 서문교회에서 전라노회 창립 총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날 참석한 대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교사 : 배유지, 이눌서, 유서백, 부위렴, 강운림, 최의덕, 마로덕, 고라복, 타마자, 하위렴

한국 목사 : 이기풍, 김필수, 윤식명

장로 : 양성률, 최흥서, 서영선, 신경운, 이승두, 최국현, 조덕삼, 이원실, 유기택, 최학삼, 이자익, 위위렴, 오인묵, 김응규

여기 한국 목사의 명단에 있어야 할 최중진 목사는 전남북대리회에서 제명을 했기에 그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이날 전라노회의 노회장은 김필수 목사였는데 모두들 최중진 목사가 있었으면 그가 초대 노회장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아쉬워했다. 부회장은 광주선교부에서 성공적으로 사역했던 배유지 선교사가 맡았으며, 서기는 이눌서 선교사의 좋은 협력자였던 전주 서문교회 이승두 장로가 맡았고 회계는 전무 남문교회 최국현 장로와 전주선교부의 최의덕 선교사가 각각 선임되었다.

전북대리회에서 제명을 받았던 최중진 목사는 자신이 관리하고 있던 교회를 전북대리회에서 이탈해 자주교회로 소속시켰고 이때 전북대리회와 전주선교부에서는 이탈해 나간 교회 재산을 찾는다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일로 정읍 매계교회가 첫 재판에 패소하면서 모든 교회당을 빼앗겼으며, 교회에서 목회해야 할 최중진 목사는 목회 자리를 잃고 정읍 시내에 생활 근거지를 두고 형평운동에 몰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동아일보 정읍지국 지국장을 역임하다가 1940년 두 동생과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세상을 떠났다.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두 동생인 최광진은 전주 서문교회 장로로 시무했으며, 막내동생 최대진은 군산 지방에서 목회 사역을 감당했다.

최의덕 선교사 송별

최의덕 선교사가 최중진 3형제를 만났을 때는 천만대군을 얻은 것처럼 기뻤으며 그들과 함께 전북 지방을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월 속에서 자주교회 사건으로 최중진 목사가 곁을 떠나게 되자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만 심장이 약해지면서 얼마 동안 전주예수병원에 입원도 하고 때로는 안식년을 맞이해 고국에서 요양을 받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년을 2년 남기고 1924년 6월 24일 군산 구암교회에서 모이는 제15회 전북노회에서 노회원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서 은퇴의 인사말을 남겼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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