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연동교회에 출석한 날은 대학교에 입학한 1962년 5월 20일 주일이었고, 마침 연동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신 선친 백리언 목사를 따라 출석했던 것이다. 서울의 중심지 종로 5가에 위치한 교회는 중후한 분위기를 갖추었고 예배당을 가득히 채운 교인들은 새로운 젊은 목사를 사랑스런 얼굴로 맞이했다. 이제부터 내가 섬길 교회라고 여긴 나는 괜히 긴장되고 엄숙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연동교회와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마침 교회에 인접한 사택에서 생활한 나는 나의 모든 생활이 교회와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교회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은 평생을 이어가는 우정을 느낄 정도의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본래 모태신앙인 면도 있었지만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은 천성적으로 나의 습성이기도 해서 매일의 생활이 그저 즐겁고 감사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대학 4년을 보내고 그 후에 군대 생활 3년을 보낸 후에 1년 동안의 미국 이민 수속 후인 1970년 12월 14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미국으로의 비행을 위해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마침 싸라기 눈이 내리는 초겨울에 돌이 지난 큰아들을 안고 김포공항에서 우리 가족은 그동안 들었던 정을 잊지 못해 공항으로 나온 20여 명의 교우들과 손을 잡고 원을 그려 서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기도를 함께 드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렇게 교인들은 서울에 남았고 나는 그들의 전송을 받으며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고생도 하고 즐거움도 느끼면서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 25년을 보냈다. 물론 새로운 환경의 이민 생활이 녹록지 않았지만 청년 시절을 온통 보냈던 연동교회에 대한 사모함이 지극했고, 그럴 때마다 ‘나의 모교회는 연동교회’라는 그리움이 지극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게 미국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덧 미국 생활이 25년을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두 아들이 모두 학업을 마치고 직장에 취업했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누워만 계셨던 아버지도 하늘나라에 가셨기에 이제는 나도 사랑하는 조국으로 귀국해서 평소에 원했던 방송인의 생활을 하기 위해 귀국했다. 도미한지 25년 만인 1995년이었다. 다행하게도 기회가 주어져 방송인으로서의 생활이 익어질 때에 악몽 같은 IMF사태가 일어나 겨우 얻었던 방송국에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고국에서의 귀중한 생활을 포기할 수가 없어 역이민의 고난을 견디면서 한국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서 내가 크게 믿고 의지하는 곳은 나의 젊은 시절의 신앙과 생활의 터전인 연동교회였다. 10월 20일에 창립 130주년을 맞게 되는 나의 모교는 나의 평생을 지탱하게 해준 모교회며, 다시 돌아온 나를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 받쳐준 자양분이 되었다. 더욱이 그동안 오랜 기간 마치 가족 같이 지냈던 교인들과는 더할 나위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제 노년이 되어 대외 활동이 뜸해지면서 교회에 가는 주일은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다. 예전에 무심하게 여겼던 ‘주일은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주님의 날’이란 개념이 확실해졌다.
무려 130년 전에 종로5가 연못골에 세워진 연동교회가 그 오랜 기간 변하지 않고 올곧은 신앙의 가치를 유지하며, 우리 사회를 인도하며 내가 그 교회의 일원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음은 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라고 여겨진다. 연동교회 창립 130주년을 축하한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