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품이 효자 상품으로… 홈패션 사업의 대전환
고급 이불 시장 급성장, 홈패션 시대 개막
사업 방향 전환·세계 베딩 시장 진출 성공
생각지도 않게 원단이 솔솔 팔려나갔다. 고급 양모 솜이불 방문판매업자가 주로 사간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불용 솜으로는 목화나 캐시미론을 주로 사용했는데 양모 솜으로 고급 이불을 생산해서 고가로 판매하는 업자들이 있었다. 일본 수출 잔품 원단으로 조금씩 특화해서 고급 혼수품으로 팔던 업자들이었다.
이 시기에 마침 이런 고급 이불에 대한 수요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다. 1980년대 초 이후 경제가 성장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주택에 살다 아파트로 이사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한반도에서 수천 년 이어져 오던 온돌방과 이부자리 문화가 서양식 침대 문화로 급격히 바뀌었고, 새집에 이사 가는 사람들은 으레 서양식 침장, 즉 침대보와 이불, 커텐을 새로 구입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는 양단이나 나일론에 수를 놓은 천을 쓰던 이불 수요가 서구식 100%의 고급 목공단, 면 날염 원단으로 옮겨갔다. 바야흐로 ‘홈패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홈패션 시대를 연 주역 중 하나가 바로 우리 회사의 침장 원단이었다. 그것도 불량품으로 취급됐던 그 원단이었다. 양장용으로는 부적합했던 다소 뻣뻣한 질감이 이불감으로는 딱 맞았던 것이다. 고급 이불 생산‧판매 업자의 눈에 띈 덕분에 우리는 불량품 물량을 모두 소진하고 재생산 요청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중요한 이유는 돈을 얼마 벌었느냐에 있지 않다. 이 일을 계기로 엄청난 홈패션, 베딩(침장) 시장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계획하고 준비해서 진입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깨달음 덕분에 우리 사업은 대전환을 맞았다.
해외 시장조사를 해보니 베딩 시장의 원단 수요가 의상 시장보다 수십 배 큰 규모였다. 베딩 시장은 4계절 내내 계속 성수기였다. 한국의 직물 날염 공장의 기계들은 대부분 10도(10가지 색깔) 미만밖에 생산하지 못했는데, 이불감에 트렌디한 무늬를 입체감 있게 넣으려면 18도 이상은 날염할 수 있어야 했다. 당시로서는 그런 생산이 가능한 기계는 방림방적에만 있었기에 그곳과 총판 협력 관계에 있는 우리의 침장 제품이 그 이후로 수년 동안 시장을 독점 지배할 수 있었다.
나는 패션 감각을 익힐 때처럼 전 세계를 다니며 베딩 트렌드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개발했다. 매년 1월에 열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하임텍스 홈패션 전시회를 찾아가서 전 세계 침장 원부자재 업체들의 수천 개 부스를 일일이 돌아다녔다.
신제품을 살펴보고 세계 메이저 회사들이 수십 년간 생산해 온 제품의 역사를 연구하기도 하면서 경영과 유통도 다시 공부했다. 회사 자료실이 가득 차도록 전 세계 메이저들의 상품 샘플을 수집해서 분석하고 한국 시장에 맞는 홈패션을 개발했다.
한때 대한민국을 떠받쳤던 섬유산업이 대부분 개발도상국으로 넘어가면서 섬유산업이 마치 후진적 산업인 듯 인식되고 있지만 지금도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침장 시장은 독일, 영국, 미국, 이태리, 스위스 등 서구권 회사 브랜드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고급 침장 시장에는 이와 같은 서구권 회사들이 발을 붙이지 못했다. 우리가 적기에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개발한 덕에 국산 제품이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누가 알아주지는 않지만 그 일에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곤 한다. 지금도 방림방적, 대한방적에서는 미국에 이불용 패치워크 원단을 수백만 미터씩 수출한다.
지금 돌아봐도 재미있는 것은 실수로 만들어진 불량품 원단이 효자 상품이 됐다는 사실이다. 사업 방향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바꾼다는 것은 계획하고 준비해도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다. 잘 나가던 회사도 신상품으로 전환하는 타이밍을 못 찾거나 예측에 실패하면 정체하거나 도태하게 된다. 최근 스마트폰 경쟁에서 한발 늦은 엘지가 결국 시장에서 물러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적기에 새로운 사업 분야를 찾아나갔고, 나중에 원단 수입자유화로 인해 다른 패션 원단 회사들이 타격을 받았을 때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나 위기가 자주 찾아오는 비즈니스 분야에서 40년간 롱런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때쯤 나는 이미 교회와 노회, 총회, 재단, 교계 연합 사업들에 시간과 정신을 온통 쏟고 있었다. ‘패션 산업은 오너 사업’이라는 말이 있다. 사장이 잠깐이라도 딴 데 신경을 쓰면 유지될 수 없는 사업이다. 그럼에도 나는 교회와 교계의 온갖 책임을 다하면서도 40여 년 동안 사업을 감당했다.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은혜다.
돌아보면 그 40여 년간의 매일이 새로운 상품과 수요를 개발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강남에서 매일 아침 차를 운전하고 동호대교를 건너 출근할 때는 마치 탱크를 몰고 전쟁터로 나가는 긴장감이 들었다. 출근해서 보면 불량품이 나오고 거래처가 문을 닫는 등 새로운 일이 터져 있었다. 싸구려 ‘짝퉁’ 복제품에 타격을 받기도 하고 납기 지연으로 클레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침착하게 살펴보면 늘 한쪽에 비상구가 열려 있었다. 어려운 일도 많이 당했고, 사업상 관계를 맺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도 했지만 한 번도 비굴하게 굽실거릴 필요는 없었던 좋은 사업이었다. 그렇게 40여 년 일궈온 사업체는 지금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다만 몇 년 전 직원들에게 파트를 나눠서 물려주고 나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아버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신나고 당당하게 인생길을 걸어갔던, 철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편안하고 행복했던 40년이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