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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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와 전라도 땅에 헌신한 최의덕 선교사 부부

이미 그는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같이 출발했던 전남노회에 가서도 같은 인사의 말을 했다. 그렇게 정들었던 전라도 땅, 이제는 그 정든 땅을 뒤로 하고 떠나는 최의덕 선교사 내외는 좀처럼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더욱이 그의 부인 잉골드 여의사는 병들어 죽어간 그 수많은 가난한 농촌 부녀자들의 건강을 지킨 의료사역으로 전북 지방에 살고 있는 많은 여성들은 그가 떠남을 마음속 깊이 아파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운계로써 인도하며 도와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찬송이 거의 끝날 무렵 순천에서 달려온 기차는 어느덧 전주역에 도착했다. 이때 최의덕 선교사 부부는 손가방을 챙겨 들고 기차 안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3분 정도 머무는 동안 다시 창밖을 내다보면서 다시 보지 못할 그 순박한 전라도 교인들 얼굴에서 주님의 은혜가 넘침을 확인하고 언젠가는 조선 독립의 날이 올 것을 굳게 믿고 아쉬운 이별을 나누었다. 기차는 3분이 지나자 지체없이 대전을 향해서 달렸다.

이렇게 아쉬운 이별을 한 최의덕 선교사 부부는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고베에 도착했다. 고베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며칠을 보내다가 고국인 미국을 향해 가는 배에 승선해 동양권을 영원히 벗어났다.

최의덕 선교사는 부인 잉골드 선교사와 함께 전주에서 늦게 결혼해 신혼살림을 꾸몄지만 1910년 전주에서 출산한 딸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들 부부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서 생활했다.

“여보, 미안해요.”

“아니 별 말씀 다 하시는군요. 자녀를 두는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라도 지방 가는 곳곳마다 믿음의 자녀가 얼마나 많소. 걱정하지 말고 그 자녀들이나 열심히 치료해서 건강하게 키웁시다.”

그들 부부는 육신의 자녀를 한 사람도 얻지를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제공해준 안식관에서 쉬면서 생활을 하다가 최의덕 선교사는 1929년 2월 9일 67세의 나이로, 부인 잉골드 선교사의 곁을 떠났다.

이 소식이 한국교회에 전해지자 전북노회에서는 1929년 5월 28일 전주 남문교회에서 모이는 제22회 임시노회에서 그를 추모하는 추모회를 열었다. 이때 1년 전에 사망한 하위렴 선교사의 추모도 같이 거행됐는데 노회장 이춘원 목사의 인도로 추모회가 개최됐으며, 하위렴 선교사의 약사는 홍종필 목사가, 최의덕 선교사의 약사는 윤식명 목사가 각각 낭독하고 이자익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때 윤식명 목사의 약력 소개를 통해 깜짝 놀랄 사실이 밝혀졌다.

“익산, 정읍, 금구, 태인, 고부, 흥덕, 부안, 임실, 남원군 등 9개군을 갈며 파종한 결과, 78개처 교회가 설립됐으며, 장로는 21명, 목사는 5명, 세례문답을 받은 수는 1천500명이나 되었다. 그는 매일 20리, 30리를 심방했으며, 주일날이면 3개의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9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잉골드 선교사

평생을 같이 살기로 하고 결혼했던 잉골드 선교사는 전주에서 같이 사역한 최의덕 선교사를 만나 전라도 땅을 샅샅이 누비고 다니면서 병든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다. 일생을 전라도 땅에 바치기로 하나님과 굳게 약속을 했지만 남편 최의덕 선교사 혼자 미국으로 보낼 수 없어서 그도 1925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잉골드 선교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태어났으며, 하이곤 대학에서 잠깐 수학하다가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1896년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후 한국 선교사로 지원해 1897년에 전주에 도착했다. 부부가 전주를 떠날 때까지 그는 28년간 한국 선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잉골드 선교사가 여자의 몸으로 그 머나먼 한국 선교사로 지원한 일은 미개한 후진국 여성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그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첫 일터는 전주 간이진료소였다. 한 해 먼저 와 있던 하위렴 선교사가 조그마한 간이 약국을 운영하면서 전주 지방 시민들의 건강을 돌보던 곳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 1등 국가의 의사면허증을 갖고 온 잉골드 선교사는 모든 선교사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도민들의 꿈을 이뤄 주었다. 그가 활동하던 은송리의 간이진료소는 선교의 장으로 활용되면서 첫 여성 환자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마련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매월 100여 명의 환자들이 몰려오면서 그의 명성은 곧 전주 시내에 알려지게 되었고 은송리 진료소를 화산동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의료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설이 확장되자 1903년에는 1천500명의 환자가 진료를 받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진료에 임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 그의 활동은 오늘의 전주 예수병원의 기틀을 만드는 데 크게 공을 세웠으며, 그의 일은 해가 갈수록 바빠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전주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강한 유생들의 고을이었기에 여성이 외출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어서 직접 여성 환자를 찾아 전주 시내를 누비며 진료를 했고, 동시에 선교도 해 많은 여성들을 세상으로 끌어내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잉골드 선교사가 최의덕 선교사와 결혼하게 됨으로써 병원에 상근하는 것보다는 최의덕 선교사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 및 계몽의 활동을 더 많이 했기에 새로 부임한 포사이드(Dr. W. H. Forsythe, 한국명:보의사, 이하 보의사로 표기) 의사에게 의료선교를 맡겼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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