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헌신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사명
바쁜 사업 중에도 교사 직분을 지키다
롤 모델 따라가며 사명 감당하기 힘써
기도의 끈으로 이어진 하나님 약속
“세례를 받으려고 결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011년, 매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을 때 산하 미혼모 시설인 ‘애란원’을 방문했었다. 미혼모 임신부들에게 세례를 집례하는 예능교회, 조건회 목사님을 돕기 위해서였다.
세례 문답을 하면서 18세의 어린 나이였던 미혼모 임신부에게 세례를 받고자 한 동기를 물었다.
“뱃속의 아이를 제가 키우지 못하겠지만, 이 아이가 복을 받았으면 해서 세례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 말에 세례식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 목사님 곁에서 성수 그릇을 들고 있던 나도 마음이 울컥했다. 비록 이 험한 세상에서 어리고 약한 엄마는 아기를 온전히 감싸줄 수 없지만 엄마의 모성애는 그렇게 아기를 향해 있었다. 이 어린 엄마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업차 유럽을 자주 다니던 시절, 1980년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의 일반석 금연 좌석에 앉으면 옆자리에 입양 가는 아이들이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이용 기내석이 따로 없을 때라 어른들이 먹는 딱딱하고 거친 하드롤빵을 아이들도 똑같이 먹어야 했다. 그게 안타까워서 나는 빵을 갈라 안쪽의 촉촉한 부분을 떼어 아이들 입에 넣어주곤 했다.
한번은 여섯 살, 네 살쯤 된 남매가 곁에 앉았다. 둘 다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기에 “누가 걸어주었니?”라고 물으니 큰아이가 “할머니요”라고 대답했다. 그 아이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눠보니 자기가 입양 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담담한 표정의 아이가 어쩐지 더 안쓰러웠다.
“거기에 가면 엄마가 있는데, 코가 크고 너랑 많이 다르게 생겼을 거야. 그래도 동생하고 잘 이겨내야 한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할게.”
이렇게 말하고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한 뒤 껴안아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그 남매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가 출장을 다녀와서 내가 부장으로 있는 소망교회 아동부 선생들에게 사연을 전해주었다. 수첩에 그 아이들 이름을 기록하고 같이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 후로도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두세 명씩 아이들 이름을 적어 와서 선생들과 함께 기도했다. 요즘 TV에서 해외 입양아들이 성인이 되어 한국의 부모를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 비행기에서 만났던 그 아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그 아이들이 잘 컸으리라고 믿는다. 우리 선생님들의 기도 후원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2007~200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복지재단 이사장을 지낸 일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보람 있는 사업들에 많이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애란원이 미혼모 한 명이라도 더 사회에 적응해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지원 프로그램을 정비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었다.
한국에서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고 다양하다. 그 일들은 수치로 계산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짧은 그 한순간이라도 따뜻함을 나누기 위한 것이다. 그 순간에 함께 했던 사람 모두에게 그 기억이 살아가는 동안의 위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께 징표로 받은 일,
교회학교 교사
사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절에도 교회 사역으로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시작해 가장 오랜 시간 매진했던 것이 교회학교 교사였다.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 무작정 “아무 일이라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던 젊은 시절 하나님께서 징표처럼 허락하신 일이었기에 교회학교 일은 내게 늘 특별했다.
처음 아동부 교사를 하던 1960년대 후반은 교회마다 예배당 건물 하나만 덜렁 있었을 뿐 교육관은 커녕 변변한 사무공간도 없을 때였다. 나무 의자 두 줄이 아동부 한 반 교실이었다. 판자촌 동네의 허름한 예배당 안 긴 의자에 선생님 한 명, 아이들 두 줄, 또 선생님 한 명, 아이들 두 줄, 그렇게 콩나물처럼 촘촘히 앉아 공과공부를 했다. 아이들은 앞뒤 반 선생님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내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초롱초롱 눈을 반짝였다.
주일학교 예산도 없고 지도해줄 교육전도사도 없었던 때다. 우리 교사들 주머니를 털어 운영비를 마련하고, 달리 장소가 없어 교사 회의도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으면서 했다. 여름 성경학교 교사 강습회가 열리던 영락교회에는 전국에서 모인 교사들이 냉방장치도 없는 석조건물 예배당에서 비지땀을 흘리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교재를 익혔다.
그때 우리가 따랐던 선배 교사들은 지금 세상을 떠난 분이 많고, 명랑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후배들도 칠순을 넘어섰다.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빠르게 성장한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는 이렇게 이름도 빛도 없이 수고한 수많은 교회학교 교사들의 땀방울이 아롱져 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날로 바빠졌지만 교사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한 주도 빠질 수가 없었다. 해외 출장을 가더라도 주일날 오후에 출발해서 다음 토요일 오후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잡았다. 내가 없으면 다른 반 수업에 끼어 계면쩍어 할 우리 반 아이들을 떠올려 보면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어도 토요일 저녁 전에는 돌아와야 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롤 모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이 소망교회에 26년을 시무하면서 출장을 최대한 길게 가더라도 주일 오후 출발, 토요일 귀국의 원칙을 지키면서 주일 강단을 비우지 않으셨기에 나도 따라 할 수 있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