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거지의 초등학교 시절 (1)
풀이나 꽃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 세상으로 나가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인 내가 이 풀만도 못하겠는가 싶었다.
눈이 어두워 빛만 꺼져 버렸을 뿐 생명이 있는데 왜 내가 낙심하랴! 나는 풀이나 꽃보다 메말랐던 나무보다 월등히 뛰어난데 낙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다시 옆에 놓아두었던 깡통을 안고 기도했다. “하나님, 새싹이 솟아나는 잔디처럼, 그리고 추위에 죽었던 나무에 새순이 돋듯 나에게도 큰 희망을 주시옵소서.”
지금도 나는 봄이 오면 땅 속에서 솟아나는 잔디와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그 옛날 잔디에 앉아 울며 가졌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때의 기도가 이루어져 교회와 사회를 위해 지도자로서 헌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 잔디에 앉아 솟아나는 풀과 꽃과 나무들에서 받은 교훈과 나에게 희망을 준 자연을 잊을 수가 없다. 희망은 절망에서 온다. 빛은 어두움에서 온다. 보유와 행복은 가난과 불행에서 온다. 꿈과 희망은 행복과 부유를 낳을 씨앗이다.
거지 체포령에 걸리다
어느덧 왕초거리의 대열에서나마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을 무렵이었다. 모든 거지들을 한 곳으로 모아 성분에 따라서 이곳저곳으로 배치를 받는 소위 거지 체포령에 걸려 나는 꼼짝없이 발령 배치를 당해야만 했다. 자율적으로 살아오던 내가 국가 시책에 따라서 타율적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모든 거지들을 붙잡아 각 섬과 수용소에 배치하는 정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산시에서 하는 사회 사업의 하나였다.
어느 날 내가 국제 시장 뒷골목에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와서 두 손을 붙잡고 깡통을 팽개치면서 차로 끌고 갔다. 그 차에는 이미 사오십 명이나 되는 친구 거지들이 타고 있었다. 소위 CAC라고 하는 트럭은 거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차였다. ‘이제 나를 죽이려고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두렵기만 해서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가 간 곳은 대신동 너머 신천에 있는 아동보호소였다. 그곳은 거지들만 불러다가 사전 교육을 시킨 다음 고아원으로 각각 배치를 시켜 주는 임시 수용소와 같은 곳이었다. 건물은 약 12동이 있었고 한 동에 100여 명씩 수용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몇 번씩이나 도망갔던 전과가 있으면 무인도로 보내졌고, 질이 좋다고 분류된 거지들은 비교적 형편이 나은 고아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아동보호소에서도 매주 주일 예배를 드렸다. 나는 아주 모범적인 반이던 4동으로 배치를 받았다. 4동은 모두가 순진한 친구들만 모아놓은 곳이었다. 어느 날 천애원에서 함께 도망쳤던 김정운이란 친구도 그곳으로 붙잡혀 왔다. 그곳에는 3주마다 원아들을 추려서 각 고아원이나 무인도로 배치하는 규정이 있었다.
어느 날 그곳 원장과 총무가 나를 찾아와서 “너는 어느 고아원으로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 당시 부산 지역에 있던 이사벨 고아원과 새들원 고아원은 모범적인 고아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곳은 때리지도 않으며 예배도 드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다.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정도의 고아원이면 신앙생활 하는 데도 아무런 불편이 없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원장님과 총무님은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아주 좋은 라이트 하우스(Light House)란 초등학교로 갈 수 있도록 추천해 주셨다.
‘라이트 하우스’ 초등학교의 추억
사흘 후 나는 차를 타고 송도 고개에 있는 ‘빛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 가 보니 나와 같이 앞을 보지 못하는 150여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아동보호소 소개서를 가지고 2층 사무실을 찾았다. 키가 자그마한 분이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에 대해 이것저것을 묻고 난 다음 “너는 참 똑똑한 아이다”라고 하면서 “우리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고 희망을 이루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그분이 바로 라이트 하우스 초등학교 교장이신 이덕홍 목사님이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이 목사님은 서울학교와 서울역 앞에 라이트 하우스를 세우신 훌륭한 사회 봉사가였다.
그러나 초등학생들은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나는 김해 대저면에 있는 송도의 분원인 김해 라이트 하우스로 몇 사람과 함께 가게 되었다. 거기에 함께 간 친구들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분들도 많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