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꿈은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성공이며,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형은 그에게 걸림돌이었다. 장자 상속의 전통에서 에서가 가진 장자의 권한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그럼에도 야곱은 성공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운명을 속여서라도 남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방법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속권과 축복권을 누릴 수 있다면 사기라도 치고 싶었다.
야곱은 생각에 그치지 않았다. 실제로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야곱은 성공했는가? 사기를 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은 바른 것이었나? 아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룰(rule)을 깨뜨려 가며 성공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기존의 룰은 지켜져야 한다. 그래야 질서를 잡아가고 세상은 그 룰에 의해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환경결정론’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의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결정된다.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지,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날 것인지 그리고 첫째인지 둘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내가 원하는 대로 태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던 내 운명이다.
판을 바꾸어야 이긴다. 기존의 룰로 성공할 수 없다면 게임의 룰을 바꾸고 운동장을 바꾸어야 한다. 키가 작아 농구가 안된다면 축구든 야구든 다른 경기를 할 수 있는 운동장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것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며 변화하는 세상에 맞추는 것이다. 성서 안에는 판을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판을 바꾸는 법,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야곱은 장막 안에서의 성공을 포기하고 광야라는 운동장을 선택했다. 장막 안에서는 형을 이길 수 없었으므로 광야라는 새로운 운동장에서 성공의 기회를 찾기로 한 것이다. 그야말로 장막에서 광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룬 것이다. 이것이 절묘한 수다. 장막 안에서의 게임은 결정되어 있었다. 장막 안은 내가 성공할 수 없는 곳이었다. 형을 속이고 이긴들 그 승리는 의미가 없다. 모두가 이기는 게임을 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운동장을 바꾸어야 가능하다. 게임의 룰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이 광야다. 야곱이 위대한 것은 판을 바꿀 줄 아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판을 바꾸어야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다.
나는 야곱이다. 시력을 잃어 누구와도 경쟁할 수 없는 절대적 한계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단 하루도 나의 이런 조건을 잊은 적이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내 삶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성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절망해야 했다. 열등감으로 때로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롭고 힘이 들었다. 죽는 날까지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판을 바꾸며 살아야 한다. 장막 안에서 나는 행복할 수 없다. 성공의 삶을 위해 나는 광야로 나와야 한다. 운동장을 바꾸고 게임의 룰을 바꾸어야 한다.
새로운 운동장의 심판자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룰을 가르쳐 주신다. 그것으로 우리는 절망을 넘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아직 기회가 있다. 장막 안에서 벗어나 광야로 나가자!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