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도의 문학산책] 작가 이광수의 빛과 그늘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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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으로 끌려가다

“나는, 나라도 민족을 위해 일본놈들한테 붙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는 변명할 수 없다. 내가 지은 업보는 내가 감당할거다”(유재원 외국어대 명예교수의 증언)

해방 당시 영창서관 사장이던 유장열(유 교수의 부친)  사장의 후일담이다. “아버지께서 춘원을 집으로 찾아가, 시절이 불안하니 잠시 피신하라는 귀띔과 함께 도피자금을 전하려 했으나 춘원이 사양하며 남긴 말”이다.(<월간조선> 6월호)

이 말은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으나 자신의(춘원) 진심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춘원은 6.25동란(1950년) 때 마포 자택에서 인민군에게 잡혀 북한으로 끌려갔다. 

춘원은 수필 <돌베개>를 통해 자신의 돌베개에 얽힌 이야기를 수회하고 있다. 다음은 <돌베개>의 전문이다.

옛날 한시에 고침석두면(高枕石頭眠) 이라는 구가 있다. 돌베개를 높이 베고 잔다는 말이다. 세상을 버린 한가한 사람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탈건괘석벽노정쇄선풍’-갓벗어 바위에 걸고, 맨머리에 솔바람을 쏘인다 함과 같은 말이다. 옛날 뿐 아니라 지금도 산길을 가노라면,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돌베개를 베고 자는 사람을 보는 일이 있다. 대단히 시원해 보인다.

구약 성경에는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좋은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야곱은 세상을 버리거나 잊은 사람은 아니요, 한 큰 민족의 조상이 되려는 불붙는 야심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 민족의 큰 조상이 되었다.

나는 연전에 처음 이 집을 짓고 왔을 때에 아직 베개도 아니 가져오고 또 목침도 없기로 앞 개울에 나가서 돌 하나를 얻어다가 베개를 삼았다. 때는 마침 여름이어서 돌베개를 베고 자는 맛은 참 시원했다. 그 때부터 나는 돌베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돌베개에는 한가지 흠이 있으니 그것은 무게가 많은 것이다. 여간 기구로는 도저히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광릉 봉선사에 유할 때에는 다른 돌베개 하나를 구했다. 그것은 참으로 잘생긴 돌이었다. 대리석과 같이 흰 차돌이 여러 만년 동안 물에 갈리고 씻긴 것이어서 희기가 옥과 같았다. 내가   광릉을 떠날 때에는 거기 두고 왔다.

내가 돌베개를 베고 자노라면 외양간에서 소의 숨소리가 들린다. 씨근씨근, 푸우푸우하는 소리다. 나는 처음에는 소가 병이 든 게 아닌가 했더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십여 일 연해 논을 가느라고 몸이 고단해서 특별히 숨소리가 크고 또 가끔은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못난이니, 자빠뿔이니 갖은 험구를 다 듣던 우리 소는 이번 여름에 십여 집 논을 갈았다. 흉 보던 집 논도 우리 집 소는 노엽게도 생각하지 않고 갈아 주었다. 그러고는 밤에 고단해서 수없이 한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춘원의 주요작품으로는 <무정> <흙> <단종애사> <마의태자> 등이 있다.

이광수의 수필집 돌베게 초간본

 

박이도 장로

<현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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