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도의 문학산책] 한국어와 한국인 (上) 모어(母語)를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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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소통의 요건이다. 언어나 기호 따위가 없다면 소통에 큰 지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는 한자어와 한글로 구성되어 있다. 뜻글자인 한자어는 사물이나 관념 따위를 창출하거나 상징화한 개념어이다. 이에 반해 한글은 소리글자로 대상을 기호화하고 다양한 음성상징으로 소통의 수단으로 쓰고 있다. 

이처럼 두 가지 언어를 섞어 쓰는 한국인의 창조적 발상력을 세계가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어의 국제적 위상을 신장(伸張)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를 어떻게 교육하고 활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아연실색하게 된다. 오늘날 여러 매체에서 쓰고 있는 기사를 보면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각종 매체를 구독자들이 읽어도,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수백 년 전부터 익히 쓰던 한자(漢字)를 한국 발음을 따 한글로만 쓰니 무슨 뜻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반한맹(半漢盲) 자들만 양성한 셈이다. 또한 대학이나 언론매체가 부화뇌동(附和雷同)해 한자어를 일체 쓰지 않으니 언중(言衆)의 문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 밖에도 외래어의 임의적인 기호화, 우리 글을 줄여 약어(略語)화 또는 외래어와 한국어를 붙인 합성어 따위들인데, 언중이 알 수 없는 제목이나 내용이 되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우매한 언중의 탓이라고 매도(罵倒)할 수 있는가.  

서부진언(書不盡言) 언부진의(言不盡意)(글로써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고, 말로써는 자기 뜻을 정확히 나타낼 수 없다)는 말(주역)은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든 완벽한 소통은 어렵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오래된 언어소통의 관습을 법과 제도로 한자어를 계속 강제할 수는 없다.

1.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라고 말하니까

심심한 사과(맛없는 사과)는 받을 수 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한다.

심심(甚深), 深深한 사과(謝過)는 매우 정중하게 잘못을 빕니다라는 뜻이건만 이 사람의 문해력은 한자 교육을 전연 받지 못한 사람의 수준이 아닌가. 1972년 문교부가 제정한 기초 한자 1800자(중․고․교)는 명목상의 훈령일 뿐이었는가.

  

2. 시집보내드릴께요.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H 권사에게 저의 시집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 후 그녀의 남편인 P 집사를 마주쳐 시집을 건네주며 한 말이다. 이 말을 들은 P집사님이 한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럼 나도 장가보내주셔야지요”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재치있는 해학인가. 이 장면에서 P 집사는 시집(詩集)과 출가(出嫁)(시집보내다)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재치있는 해학을 구사할 수 있었다.

3. 가)무엇이 생각되어지고 있습니까?

나) 안녕히 가시께요. 이 쪽으로 오시께요.

가)는 유식자 간에 상투어가 된 현재 진행형의 화법이다. 서투른 번역문장의 냄새가 짙다. 나)는 근년의 병원 간호사들의 화법(?)이다. 대형병원이거나 동리병원이거나 간호사들이 공통으로 쓰는 말인데 듣기가 심히 거북하다. 환자와 손님에게 최상의 존칭어를 쓴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이건 우리의 화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문법이나 관행적 화법과도 맞지 않는다. 

박이도 장로

<현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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