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알 수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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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에 문외한인 사람이 21세기를 살자니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비트코인이니 하는 소위 가상화폐 소리를 들으면 남들은 이걸로 재산을 증식하는 모양인데 나는 구경도 한 적이 없으니 혼자만 뒤처지는 느낌이고, 나날이 늘어가는 전기차들을 바라보면서는 도대체 기름 한 방울 태우지 않고도 굴러가는데 돌덩이 같은 배터리에서 어떻게 그 큰 힘이 솟아 나오는가 많이 궁금하다. 

그 옛날 집에서 볼 수 있던 첨단기계는 어머니가 쓰시던 손재봉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애용하신 빅터 레코드 축음기였다. 나무 통 밖으로 나와있는 핸들을 돌려 태엽을 감고 회전판 위에 레코드판을 올려놓은 다음 뒤로 제쳐진 사운드박스를 집어 앞으로 기울이면 판이 스르르 돌기 시작하고 맨 가장자리에다 소리박스에 꽂힌 바늘을 살짝 올려놓으면 곡이 바로 울려 나왔다. 강철 태엽이 감겼다가 풀어지는 그 힘으로 판이 돌아가고 레코드판의 가는 줄 바닥에 돋은 미세한 요철을 바늘이 지나가며 생긴 진동이 소리를 재생시키는 신기한 구조를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동차는 지금까지 40여 년 몇 차례 바꿔가며 타고 다니는 동안 그것이 작동하는 구조를 웬만큼은 알게 됐고 라디오, TV 등 전자제품도 딸려 나오는 사용설명서 정도는 그럭저럭 이해할 만하다. 그러다가 컴퓨터 시대가 도래했고 이어서 스마트폰이 등장해 디지털 문명과 모바일 세계가 얼마 간격을 두지 않고 펼쳐지니 이내 ‘아날로그 세대’라고 낙인 찍혀 세상의 뒷전으로 밀려나갔다. 마치 마른 우물 밑바닥에 서서 작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노트북이 공책이 아니라 휴대용 컴퓨터를 뜻하는지도 오래됐다. 그 노트북을 무릎에 놓고 뉴스메이커와 회견을 하는 오늘의 기자들이 말(言)보다 더 빠르게 마치 소나기 오듯이 자판을 두들겨 기사를 작성하고 엔터를 쳐서 데스크로 보내면 거기서 편집자가 엔터를 때려 바로 온라인 독자에게 전달되고 종이신문 윤전기로 나아간다. 사실확인이나 심층 분석은 들어설 틈도 없다. 

사람이 어찌 세상사를 다 알면서 살 수 있으랴만 내가 종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이 물건이 어떻게 해서 세상 소식들을 남김없이 손바닥 안으로 모아서 보여주고 가족, 친구, 친지들이 시도때도 없이 서로 대화를 나누게 하고, 또 요즘은 유튜브 쇼츠라는 영상매체도 나와서 한번 열면 끝도 없이 인간천태만상을 보여주어 전철역 내릴 곳을 놓치게 하는지 모르겠다. 역을 나오면서 보니 젊은이들이 전화기를 티켓으로도 사용한다. 

세상은 이제 보이는 것, 알 수 있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들이 함께 어울려 돌아가는데 모두다 이구동성으로 더 편히 살게 됐다고 말한다. 그것은 비록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해도 누가 나를 속이거나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시스템이 국가사회에 유지되고 그 안에서 나에게도 전체의 발전에 기여할 역할이 주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름대로 풀어본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 가지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현실이 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이 확실해진다”고 일찍이 다짐해 주었다. 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뜻하지만 그것은 그대로 우리 삶의 바탕이다. 

김명식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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