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이란 이름의 뜻은 ‘버드나무 꽃’을 의미하는 양화(楊花)에 나루터를 뜻하는 진(津)을 합쳐 ‘버드나무 꽃이 핀 나루터’란 뜻이다. 양화진은 15세기(태종)부터 17세기(인조)까지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 그리고 교통, 상업, 무역 및 국방의 요충지대였다.
대원군 때 천주교를 핍박하는 조선을 응징하고자 프랑스 군함 3척이 양화진까지 왔다가 패퇴하는 일이 있었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한강 나루터 양화진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겠다 라고 선언하고 엄청난 처형 행렬을 시작한다. 이곳은 천주교 신자 8천 명이 처형당하는 병인사옥 능지처참 현장이 된다. 양화진 잠두봉은 이름하여 절두산으로 바뀌게 된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독일, 영국(1883년), 이탈리아, 러시아(1885년), 프랑스(1886년) 등, 서구 여러 나라로 번져갔다. 통상조약 가운데 서구 외국인이 조선에서 사망할 때 묘지를 제공한다는 약정이 들어있었다. 1884년 알렌이 한국 땅에 들어오고 그해 갑신정변에서 명성황후의 사랑을 받던 민영익이 큰 상처를 입고 죽게 생겼다. 알렌은 여러 번의 수술과 지극정성의 치료로 민영익을 살려낸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12일 뒤 제중원이 됨)이 설립되고 알렌에 이어 헤론(Heron, John W.)이 2대 원장으로 취임하지만, 헤론은 환자를 돌보던 중 이질에 걸려 병상을 지키던 언더우드와 게일 곁에서 40의 나이, 1890년 7월 26일 별세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헤론은 양화진 선교사 묘지공원에 묻히게 되는 첫 번째 외국인이자 선교사가 되었다. 이곳엔 555기의 외국인 묘가 있으며 단연 미국인이 279기로 가장 많고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도 167기가 있다.
이것이 초기 선교의 영성이었다. 복음이 가는 곳마다 버려진 땅이 성지가 되었다. 쓰레기 더미, 길가에서 죽은 시체가 버려지는 땅이 대구의 청라언덕이 되고 광주의 선교사 묘지공원이 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었다. 오늘도 복음이 가는 곳엔 사람이 변하고 땅이 변하고 공동체가 변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양화진을 갈 때마다 우리의 눈길을 멈추게 하는 몇 곳을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는 서쪽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반겨주는 언더우드 가족들이 잠들어 계시는 묘비다. 140년 한국 선교역사에서 한 분을 남기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언더우드를 손꼽게 될 것이다. 둘째는 동막교회, 승동교회의 설립자 무어의 묘비이다.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 해방가였다면 무어는 백정 해방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서면 감리교 선교사님들 몇 분이 우리를 반겨준다. 그래서 셋째 원산 대부흥 운동을 일으킨 하디, 넷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고마운 선교사 헐버트 선교사의 묘비이다. 묘비엔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와 함께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하는 그의 평소 소원이 적혀 있다. 다섯째는 언덕 끝자락에서 만나는 홀 가족의 묘비이다. 이들의 한국 사랑, 헌신의 정신을 되새기다보면 눈물을 닦으며 양화진을 조용히 걸어 내려오게 될 것이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