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왕초거지의 초등학교 시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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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하우스에서 일하시던 분들 중에서 생존하고 있는 이는 남산 침례교회 박용봉 장로님이신데, 고려대학교에서 수학하시다가 중도에 실명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신경 선생님은 나이 어린 학생들을 담임하셨고, 박 장로님은 비교적 나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한 선생님은 임마누엘 여명원의 전신인 한빛학교 원장 겸 교장으로 수고하다가 하늘 나라로 가셨다.

그 당시 나와 함께 한 선생님께 배운 생존자들은 강영춘 씨와 유재덕 씨 등 여러 명이었다. 모처럼 나는 어머니 같은 한신경 선생님 곁에서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함께 잠을 잘 수 있었다. 어머니처럼 나를 사랑으로 길러 주신 그분의 따뜻한 사랑을 잊을 수 없다.

그곳에서 한글 점자를 다 배우고 첫 여름 방학을 맞았다. 김해 일대는 배나 사과밭도 많고 포도밭과 김밭이 많아 과일이 풍성한 고장이다. 아침 일찍 수업이 끝나면 점심 후에 낙동강 하류에서 수영을 했다. 몰래 포도 서리를 해서 강물에 씻어 먹던 추억이 새롭기만 하다.

그 당시의 낭만은 이런 것이었다. 밤이면 몰래 감나무 위에 올라가서 감 서리를 해먹고, 친구들과 감자 서리를 해서 선생님과 함께 나누어 먹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나이 많은 고학년 학생들과 함께 낙 동강가에서 잡은 재첩으로 맛있게 국을 끓여 먹던 일이며, 밤이면 옥수수나 감자를 쪄 먹으면서 배를 보관하는 창고 뒤에 자리 깔고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하던 추억이며, 모닥불 피워 놓고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던 그때는 생각만 해도 즐겁기만 하다.

그렇게 즐겁던 초등학교 생활의 추억도 여름 한철로 끝났고 송도에 있던 150여 명의 시각장애 학생들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됨에 따라 서울 효자동에 있는 학교로 다시 옮겨졌다. 김해에 갔던 나이 어린 학생 몇몇은 다시 송도에 있는 라이트 하우스 초등학교로 갔다.

그곳은 그 당시 서울학교 부산 분교였다. 청각장애 학생은 100여 명이 넘었고 시각장애 학생은 불과 50여 명이었다. 나는 점자를 열심히 배워 4학년으로 편입하고 한 학기가 지났을 때 6학년으로 월반했다.

오해, 편견으로 받은 상처들

나는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고난을 체험했다. 참으로 끔찍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당시 라이트 하우스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앞 못 보는 학생을 마구 때려도 누구 한 사람 말리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선생님들까지도 합세하는 판국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미 고인이 되신 안 선생님이란 분은 밤늦도록 술먹고 난 다음 새벽 한 시경 잠자는 학생들의 방에 와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안마해 달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여학생 방에 들어가서 자는 아이들을 깨워 차마 선생으로서는 할 수 없는 못된 행동을 저질러도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조차 없었다. 나는 얼마나 갈등을 느꼈는지 모른다. 이것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학교일까? 이런 사람이 과연 선생일까?

하루 저녁은 선생님들이 모여 대화를 하다가 나갈 때쯤 되어서 유병은 선생이 갑자기 “아, 내 구두끈 하나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 다음날 아침 양 사감은 나를 불러 놓고 “네가 가져간 것이 분명하다”면서 대나무 꼬챙이로 나를 두 시간 동안이나 마구 구타했다. 내가 여선생의 구두끈을 가져다가 어디에 쓴단 말인가.

맞은 다리가 부풀어올라도 학생들은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고 안타까워만 했다. 그 광경을 바라본 산 증인이 지금도 생존해 있다. 그는 나와 함께 한국시각장애인연합교회의 동역자로 있는 박석권 목사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 받은 억울함과 상처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런데 양 사감 때문에 또다시 상처받는 일이 일어났다. 1954년 새해를 맞이해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윷놀이를 했다. 그리고 떡국도 맛있게 끓여 먹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양 사감과 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평가했다.

그런데 양 사감은 자기에게 조금씩이라도 선물을 사 주거나 잘해준 학생은 무조건 희망이 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양 사감은 나를 보더니 아무리 보아도 희망이 없다고 평을 했다. “공부도 못하고 까불기만 하니까 부산학교를 졸업하고 안마나 배워서 먹고살면 다행이지” 하고 야유 섞인 말로 나를 억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분노를 꾹 참고 밖으로 뛰쳐 나가고 말았다. 라이트 하우스로부터 약 500미터 떨어진 군인 아파트에는 70개나 되는 계단이 있다. 시각장애 학생들이 아침저녁으로 그곳에 가서 놀기도 하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곳이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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