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 성장·작은 기적들 마주한 감동의 순간들
바디매오의 기적·제자에게 선물한 새로운 시야
삶의 순간 속에 다시 만난 제자들의 성공 이야기
그렇게 오랫동안 섬기다 보니 내가 가르쳤던 초등학생이 대학생이 되어 같이 교사를 하는 일도 있었다. 소망교회 고등부 부장으로 있을 때 부임해 온 교육목사가 예전 신촌장로교회에서 초등부 3학년을 맡았을 때 가르쳤던 제자여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렇게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잘 성장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최고의 상급이었다.
바디매오의 기적은 이 시대에도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새겨진 아이들이 있다. 신촌장로교회 아동부 교사였던 1967년쯤으로 기억한다. 6학년 반을 처음 맡은 날 아이들에게 돌아가며 성경을 읽도록 했다. 그런데 자기 순서에도 우물쭈물 성경을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혹시 6학년이 한글을 못 읽나 유심히 보니 책을 눈에 바짝 대고 읽었다.
“너 안경을 써야겠구나”하는 내 말에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날로부터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이는 안경을 쓰고 오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짐작됐지만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교회학교 수업이 끝난 후 아이 손을 잡고 “너희 집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반쯤은 곤란해하고 반쯤은 기대를 품은 채 앞서 가는 아이를 따라간 곳은 아니나 다를까 연세대학교 입구 철로 굴다리 위편의 판자촌이었다. 손수레를 끌며 채소장사를 한다는 부모는 갑작스런 나의 방문에 당황스러워했다. 어려운 형편인 것이 뻔히 보이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지 잘 판단이 안 섰지만 의논은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어렵게 입을 뗐다.
“아드님이 눈이 안 좋은 것을 아셨습니까?”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듯했다. 내 말을 듣고도 집안 사정이 이러니 별 방법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변두리 판자촌 아이가 안경을 쓰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었다.
별 소득 없이 집을 나서는데 배웅하는 아이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고민해 보니 우리 교회에 계신 교육전도사님이 연세대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중에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한 김동익 목사다. 그분에게 부탁하니 아이가 세브란스 안과에서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줬다.
아이의 시력검사를 한 뒤 안경을 맞춰주던 날, 안경을 쓰고 주위를 둘러본 아이는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예수님이 고쳐주셨던 여리고의 장님 바디매오가 생각났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눈을 뜨이는 기적들을 일으키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의 기적이 멀리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지금도 이룰 수 있는 작은 기적들이 많이 있구나!”
참으로 보람되고 행복했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늘 주눅들어 있었다는 아이는 그 뒤로 몰라보게 명랑해졌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선생님, 그때 제 눈을 뜨게 한 안경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은 이후로 저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신앙의 시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 저는 하나님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서울 강남의 한 교회에서 아동부 성가대의 지휘자로 섬기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성공을 보는 스승의 보람
한번은 한양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 여의사가 내게 다가오더니 “선생님!”하고 불렀다. 누군가 하고 자세히 보니 20여 년 전 교회학교 아동부에서 가르쳤던 제자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중에도 동생 한 명은 등에 업고, 두 명은 양손에 잡고 예배를 드리러 오던 기특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이렇게 멋진 의사 선생님이 된 것을 보니 무척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이 제자는 이후로 내게 박사학위 논문을 보내주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소망교회 현관에서 예배 안내를 하고 있었는데 탤런트 이경진이 “선생님!”하고 알아보며 반긴 일도 있다. 홍익초등학교 4학년 때 교회학교 내 반에서 같이 공부했는데 이제는 드라마에서 어머니, 할머니 역을 주로 맡으니 세월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둘 다 마음만은 그때 그대로여서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한참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교회학교 고3 반을 맡을 때는 비상사태도 벌어졌다. 한번은 밤 12시쯤에 우리 반의 한 남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집 나왔어요.”
평소 부모와 갈등이 잦았던 아이는 그 늦은 시간에 집을 뛰쳐나와 갈 데가 없어 내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고 내게 전화를 해준 것이 고마웠다. 얼른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니 순순히 말을 들었다.
아이와 마주앉아 두 시간여 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다 들은 후에는 “그래, 네 마음이 정말 힘들었겠구나”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새 그 아이는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는데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동안 어르고 달래자 새벽 2시쯤 마음이 풀어져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부모와의 면담을 통해 조금씩 대화할 것을 권해 드렸고 아이는 그 뒤로 눈에 띄게 달라졌다. 대학도 진학하고 청년회 활동도 열심히 하더니 나중에는 교회학교 교사도 맡아 했다.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거나, “선생님, 저 이번에 농촌으로 봉사활동하러 가요. 기도해주세요”하면서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