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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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군산 선교와 데이비스 선교사의 헌신·희생

“지금 군산에서는 많은 부녀자들이 군산교회로 몰려와 이들을 지도할 사람이 필요하니 빨리 내려오시기를 바랍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전위렴 선교사의 소식을 듣고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도착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전위렴 선교사 집에 임시로 숙소를 정하고 전위렴 선교사를 도우면서 군산 선교에 임했다. 이미 군산교회에는 40여 명의 교인이 매주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이 중 여성들이 30여 명이나 되었기에 데이비스는 이들을 따로 모아 성경반을 운영하면서 직접 성경을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이들에게 예배에 필요한 찬송도 가르쳤고 11시 아침예배에 참석하게 해 예배 시간은 더욱 알차게 진행됐다. 다른 날은 유대모 선교사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일을 도왔다.

유대모 선교사는 조그마한 선교선을 만들어 조사들과 함께 금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금강 강가에 자리 잡고 있는 크고 작은 마을을 찾아 다니면서 진료에 임했으며, 데이비스 선교사는 마을 구석까지 방문하면서 환자를 찾아 다녔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부녀자들은 데이비스 선교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유대모 선교사의 진료를 받게 됐다. 이럴 때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친절하게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했다.

군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잡신들을 많이 믿고 있었다. 어촌이기 때문에 많은 배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바다에 나가려면 무당들을 초청해 굿을 한바탕 하고 출항하기 때문이었다.

“여러분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귀신들은 다 도망하고 맙니다. 굿을 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세요.”

전위렴 선교사는 선창가에 살고 있었기에 선창가에 나가기만 하면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다.

그의 노력으로 군산교회에는 매주 새신자가 모여들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1896년에는 김봉래, 송영도가 세례를 받으면서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는 감격도 있었다. 그런데 1899년 군산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선창가로 모여들었고 많은 일본인들이 군산에 자리를 잡으면서 옥구 들녘과 김제 들녘에서 생산된 쌀을 매일같이 매입해 일본으로 실어 갔다. 군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옥구 지방과 김제 지방에서 좋은 품질의 쌀을 구입해 일본에 파는 상인들이었다.

“선교사님, 우리는 한국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군산에 왔지만 이렇게 일본인들이 자꾸 모이니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안이 나오자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군산교회 교인들도 이 일에 동의를 했다. 그래서 유대모 선교사는 군산교회 및 선교부 이전의 조건으로 선교선이 자유롭게 정박할 수 있는 바닷가에 자리를 잡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고 데이비스 선교사도 군산교회가 이전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그녀는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위렴 선교사의 구혼요청을 받고 결혼을 했으며 남편이 사역하고 있는 전주에서 활동하게 됐다. 그때 전주의 예수병원에는 많은 환자들이 입원해 있었으며, 잉골드 선교사가 원장으로 있었지만 입원 환자를 신앙으로 지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데이비스 선교사는 예수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를 찾아 다니면서 친히 기도하면서 그들을 돌봐 주었다.

호열자병으로 사망한 

데이비스 선교사

그 당시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던 호열자병 환자가 전주 예수병원에도 입원해 있었다. 간호사들이 철저히 병원 출입을 통제했지만 데이비스 선교사는 죽어가는 환자를 그냥 놔둘 수 없다면서 통제를 뚫고 병원에 들어가 그들을 위로하고 기도해 주었다. 그런데 그 병에 데이비스 선교사가 전염이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약이 없어서 결국 데이비스 선교사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1903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전주에 머물러 있는 최의덕 선교사가 그의 장례식 집례를 인도했으며, 전주 시가가 잘 보이는 완선 언덕배기에 그의 시신을 안장했다.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하위렴 선교사는 얼마 동안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 일본 고베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 머물면서 재기의 기회를 기다렸다.

군산 선교는 유대모 선교사가 원하는 대로 강을 끼고 있는 구암 쪽에 정해져 구암에 새로운 선교 기지가 마련되었다. 전위렴 선교사의 주택이 먼저 건축되면서 선교 기지는 활발하게 진행됐으며, 1899년 12월 21일 완공 기념으로 추운 겨울이지만 주일 예배를 전위렴 선교사의 넓은 거실에서 드렸다. 물론 군산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교인들도 주님의 날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먼 거리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이미 군산교회에서 학습‧세례를 받았던 김봉래와 송영도는 다른 교인들보다 더 열심히 봉사했으며, 다른 교인들도 뒤질세라 주일이 되면 일찍이 교회에 출석해 장년반 성경공부에 임했다.

그런가 하면 전위렴 선교사는 혹시라도 교인이 결석하면 어떡할까 걱정하면서 매주일 출석을 불렀는데 결석자가 생기면 조사를 데리고 함께 심방을 가서 그들에게 결석의 이유를 묻고 다음 주일에는 꼭 출석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당부했다.

이렇게 군산 선교가 활발해지자, 1899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불(W. F. Bull, 한국명:부위렴, 이하 부위렴으로 표기) 선교사와 엘비(Miss L. A. Alby, 후에 부위렴 선교사와 결혼) 선교사를 군산에 파송했다. 역시 같은 시기에 스트레퍼 여선교사는 목포 지방으로 파송됐다.

구암교회는 매일같이 새신자가 이어져 1900년에는 어느덧 95명이나 되는 세례교인을 확보하게 됐다. 그런데 전위렴 선교사는 구암에 주택을 건축하느라고 지나치게 무리한 탓으로 그만 건강에 이상이 오고 말았다.

“전위렴 선교사님, 더 이상 활동을 계속하면 생명에 위험이 있습니다. 잠시 미국에 가서 요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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