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우연과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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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우연이 연출한 극적인 장면을 우리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에서 본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해 깊은 구덩이에 가두었을 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일부터 시작해, 요셉은 수많은 우연적인 사건들을 만나고 점점 더 깊은 불행으로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된다. 

요셉이 겪은 그 모든 불행과 고난이 무의미한 우연적인 사건의 연속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축복과 섭리의 역사였음이 드러난다. 영국의 랍비 조너선 색스는 이 이야기에 ‘과거의 미래’라는 제목을 붙여 심오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과거의 의미가 미래에 가서야 결정된다는 뜻이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무신론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인생이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인간은 운명의 가혹한 힘에 휘둘리는 연약한 존재라고 읽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우연한 사건 가운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감지한다. 똑같은 객관적인 사실을 섭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우연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으므로 우연적 사건들과 형들의 악행이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의 일부였음을 깨닫고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화론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지질학, 천문학, 고생물학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구에서 35억년 전 최초의 단세포생물이 출현한 이래 진화의 과정을 거쳐 점점 더 복잡한 생명체들이 나타나서 인간을 포함한 현재의 다양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찰스 다윈이 제시한 진화론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이론으로 이 진화의 과정을 설명한다. 현대과학이 발전할수록 진화론적 설명이 설득력이 더해지고 더 많은 증거가 제시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이런 점에서 진화론은 객관적 사실에 가깝다는 과학계의 주장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진화론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과 그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의미 또는 세계관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설명으로서의 진화론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진화의 과정에서는 돌연변이라는 우연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연이 환경과 작용해 생명의 다양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진화론의 핵심주장이고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실로부터 모든 생명의 역사가 우연에 불과한 것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허무한 소동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을까? 아니 오히려 우연이라는 과정을 통해 기막히게 아름답고 풍성한 생명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섭리가 더 놀라운 것은 아닐까? 진화라는 객관적 사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신앙의 몫이 된다. 

근대과학은 원래 기독교 정신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질서의 규칙성과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 과학의 정신이었다. 근대과학을 시작한 갈릴레오, 뉴턴, 케플러 같은 과학자는 모두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우연으로 설명하는 과학주의의 어리석음은 개탄할 만하다. 이제 세상이 단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가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공지능의 시대에 과학이 가져올 가공할 위험에서 우리 인류가 벗어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다.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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