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偏見)이란 일방적인 견해, 즉 편향된 견해를 말한다. 그래서 ‘고든 올포트’는 “편견은 충분한 근거도 없이 다른 사람을 나쁘게 보는 생각”이라고 정의했다. 왜 편견이 심각한 죄가 되는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굴절되게 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을 이유 없이 미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편견에 사로잡혀서 미워하는 사람은 뚜렷한 이유가 없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이방인들을 무조건 미워하고 경멸했다. 이방인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부정하다고 했다. 무서운 편견이다. 놀라운 것은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에게도 그런 편견이 있었다. 그처럼 편견에 의한 잘못된 전통은 영혼을 망가뜨린다.
고넬료가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려고 사람들을 보낸 다음 날, 그들이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는데,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다. 그리고 보자기 같은 그릇 안에는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 그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제가 결코 먹지 않았습니다” 대답했고, 그때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보자기 같은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갔다. 그런 일이 세 번 있었다는 것은, 편견을 깨뜨리기가 어렵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편견을 깨뜨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드리워진 보자기 그릇에 부정한 생물들이 있었고, 그 그릇이 다시 하늘로 올려져 갔다는 사실은 부정한 것에 대한 인간적인 관점을 깨뜨리라는 암시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을 볼 때도 세상의 관점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그를 보시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비록 과거에는 형편없는 존재였어도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느냐가 중요하다. 또한 그의 현재 모습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귀하게 보시는가 하는 관점으로 그를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가진 기준으로 바리새인은 정결한 존재이고 세리는 부정한 존재라고 여기지 않으셨다. 눅 18:9-14에 나오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보면 오히려 예수님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마음이 세리 편에 있다는 암시이고, 편견이 없으셨다는 증거이다.
편견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치명적인 죄이다. 우리는 불의한 사회적 잣대로 남을 깎아내리고 나를 높이려는 편견 본능을 잘 극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 했다. 예수님의 관점과 마음을 품고 편견에서 자유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속히 뒤따를 것이다.
김대훈 목사
<포항대송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