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산에서 공부하던 시절 청각장애인들과 같이 공부한 적이 있었다. 물론 청각장애인은 수화로 따로 공부했다. 그리고 우리 시각장애인에게도 수화를 가르쳐서 함께 공부하고 시험을 치렀다. 그 결과 시각장애인반의 성적이 더 낫다고 칭찬을 듣기도 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이리저리 부딪히고 헤매는 바람에 청각 장애인들로부터 놀림감이 될 때가 있었다.
내 신앙의 뿌리를 내린 한양교회
1955년은 부산 지방에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때로 기억된다.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였으니 얼마나 시끌시끌했겠는가. 이들 중에는 함흥이나 원산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표를 받고 큰 군함으로 부산까지 피난 온 사람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하루는 최순직 목사님과 이명숙 전도사님이 이 학교를 찾아오셨다.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있는 나에게 “너 예수 믿느냐? 요한복음 9장을 믿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네, 요한복음 9장을 확실히 믿고 내 눈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답한 일이 기억난다.
그때부터 최 목사님께서는 한양교회로 출석하라고 권하셨다. 이를 계기로 그 교회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 주셔서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가 있었다. 또한 그 교회를 통해 신앙의 뿌리가 더욱 든든해졌으며 그 당시 교회에 출석하던 시각장애인 중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목사가 되었다.
6.25 전쟁이 나자 이 전쟁의 피해로 인해 고아와 과부들이 많아졌다. 큰 부흥운동은 정신적으로 무기력하던 피난민들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소망이 없던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혜성같이 나타난 자칭 동방의 감람나무요, 위로의 종인 박태선 장로가 있었다. 부산 공설운동장에 수만 명이 모여서 열흘 내내 밤낮 집회를 했다. 그 소문을 들은 우리들은 비록 어린이들이었지만 송도에서 공설 운동장까지 걸어서 집회에 참석했다. 밤을 새우면서 기도를 하고 새벽녘에는 학교로 돌아와 공부한 다음 다시 집회에 참석했다.
우리는 안수기도를 받으려고 밤새 기도하면서 줄을 서 있다가 간신히 박 장로란 분이 지나갈 때 머리를 내밀었다. 그래도 우리의 눈은 열리지 않았다. 옆에 있던 여 성도가 “학생들이 눈을 못 뜨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러니 오늘 밤 철야 기도하고 내일 새벽 박 장로가 안수하면서 지나갈 때 팔을 꼭 잡고 눈을 뜨게 해달라”고 애원하라는 것이었다.
순진했던 나는 그대로 믿고 학교를 결석해 가면서 철야기도를 드렸다. 드디어 새벽이 되어 그는 “쉿쉬” 소리를 내면서 안수를 시작했다. 내 차례가 되자 용기를 내어 “장로님! 내 눈이 보이게 해주세요”하면서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의 팔은 기둥 토막같이 굵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는 주먹으로 내 빰을 힘껏 내리치는 것이 아닌가? 하마터면 귀 고막까지 떨어져 청각장애인이 될 뻔했다. 그제서야 박 장로가 가짜인 줄 깨닫고 그 즉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재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큰 사역이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1955년 겨울 방학이 되었다. 나는 부산초등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완행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효자동 서울학교를 무작정 찾아나섰다. 서울역에 내렸다. 눈이 내린 추운 날씨에, 코트와 두꺼운 양말조차 신지 못했던 나는 매서운 추위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강추위는 금세 나의 귀와 얼굴을 얼려 버릴 기세였다. 고무신을 신고 있는 발은 이미 감각을 잃었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도 참아 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마침 서울역 앞에는 시각장애인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빛의 집’이 있었다. 평소에 존경하던 고 김석안 전도사님이 그곳에 계셨지만 너무 이른 새벽이라 전도사님 댁을 차마 찾아갈 수는 없었다. 물론 전도사님 댁을 찾아가면 따뜻하게 맞아 주시고 따끈한 아침 식사와 함께 몸도 녹일 수 있었겠지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울역 대합실에서 기다렸다가 효자동 가는 전차를 타고 효자동 종점에서 내렸다. 서울학교 가는 길을 여러 차례 물어서 그곳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있던 키다리 전봇대며 열려진 하수구와 길거리에 놓여진 손수레가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하마터면 하수구에 발이 빠져 큰일 날 뻔하기도 했으나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