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 부활 신앙의 기원과 부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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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기원과 내용 <1>

비록 이스라엘의 신앙의 역사는 처음부터 희망의 역사였지만, 오랫동안 죽은 자들의 부활은 신앙되지 않았으며, 죽은 자들이 영혼의 상태로 계속 생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되지도 않았다. 고대의 이스라엘에게 죽음은 하나님과 맺는 생생한 교제 안에서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영위하는 충만한 삶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불평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순종적인 삶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은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곧 죽음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오래도록 누렸던 생명의 자연스럽고 취소할 수 없는 종말로 생각되었다. 비록 젊을 때와 타향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형벌로 간주되었지만, 노년기에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죽음’은 그다지 충격적으로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 후의 개별 인간의 운명은 깊은 사색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은 조상들에게 돌아가며(창 25:8), 조상들과 함께 잠들고(왕상 22:50), 죽음은 마치 곡식이 영글어 타작마당에 떨어지는 것(욥 5:26)과 같다. 이처럼 고대 이스라엘은 죽음을 매우 담담히 받아들였다. 

비록 땅과 후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에 관한 위대한 약속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표현했지만, 이러한 기대는 개인의 불멸에 대한 희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후손의 번영에 대한 희망을 통해 표현되었다. 예컨대 아들과 자손들을 본 야곱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 안에서 담담히 죽음을 맞는다. 야곱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후손을 통해 성취되어가는 것을 본다. 후손들은 점점 더 번성할 것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경험할 것이다. 이와 같은 희망 속에서 죽어간 야곱에게는 죽음 후의 운명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야곱의 운명은 그의 후손들이다. 그의 후손들 가운데서 야곱(그의 이름)은 – 그의 선조들처럼 –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 후손은 매우 중요했다.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미래가 없이, 희망도 없이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은 점차 불행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비록 죽음은 하나님의 개입의 탓이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비통하고 힘겨운 것, 하나님과의 생명관계가 끊어지는 것으로 음울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인생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그림자, 아침이슬, 허무한 잡초, 흘러가는 물과 같다.(시 90:3-12, 전 9:1-6) 이로써 인생의 허무함이 점점 강하게 전면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 스올(Sheol)이라는 바벨론 신화의 표상이 이스라엘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스올은 죽은 인간이 내려가는 먼지와 그늘의 나라다. 이 땅에서 선하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부자든 빈자든, 늙어서 죽었든 젊어서 죽었든, 모든 인간은 지하세계에 내려간다. 거기서 죽은 자는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며, 인간과도 교제하지 못한 채, 그늘지고 허무한 실존을 영위한다. 죽은 자는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하나님도 죽은 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벗어나 망각의 땅에서 산다.(시 88:6) 스올에 거하는 것은 지상의 비통한 삶보다 더 가련하다.

나중에 스올에 대한 표상은 지혜문학 안에서 영혼불멸의 표상과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죽고 난 뒤에도 영혼의 형태로 하나님의 영광 속에 계속 살아 있다.(지혜 3:1-9) 의인의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서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는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의인이 형벌을 받아 죽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의인은 불멸의 희망을 누리고 있다. 

포로기 후에 이스라엘은 죽음에 맞서는 희망을 새롭게 제기하기 시작했다. 만약 생명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한다면, 만약 하나님이 생명과 죽음의 주님이라면, 왜 이러한 교제가 죽음 속에서 끝나야 하는가? 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생각하지 않으며, 왜 죽은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가? 죽음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은 점차로 문제시되었다. 왜냐하면 죽음의 자연성은 하나님 신앙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현실의 주관자와 창조주라면, 하나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한 신실함은 죽음보다 더 강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죽은 자들에 대한 희망은 불멸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자라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궁극적인 결과로서 주어졌다.(시 16:9-11, 73:23-26 참조) 다시 말하면, 영생에 대한 신뢰와 희망은 불멸, 영혼, 부활 등에 관한 관념적 표상보다는 하나님의 생명 능력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자라났다. 특히 하나님의 보편적 왕권에 대한 신앙은 영생의 희망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신건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전)

•생명신학연구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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