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사르르 옷깃에//가을빛 담아 내린 햇살/곱게 물들어 간다//창가/스친 세월 눈물 꽃//빛에 영글어/사랑이 쏟아지고//갈 빛 아직/알곡 태우는 소리//갈 바람 고향/가슴에서 익어간다//-이정균 장로 ‘여로(旅路)’
이 시를 언뜻 보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서정시로 보인다. 그런데 좀더 깊은 의미로 살펴보면 차안의 세계에서 피안의 세계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인생관’이 잘 표현된 시라 하겠다. 이 시의 제목이 여로(旅路)이기에 그렇다. 여로는 인생의 노정이요, 여정이 아닌가.
본 시 1연과 2연에서 말하는 ‘가을바람’ ‘가을빛’은 무엇을 말함인가. 가을은 일생 중 ‘인생수확기’를 말하고 ‘바람’과 ‘빛’은 알곡을 여물게 하는 ‘매개체’이다. 그리고 3연 첫 행의 창가의 ‘창’은 그간 살아온 인생의 의미를 시대적 시점과 관점을 통해 바라보는 창이다. 그리고 ‘눈물의 꽃’은 무수한 나날 악전고투로 이루어낸 알찬 결과를 표현했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일종의 한 과정일 뿐이다. 꽃이 아무리 곱고 아름다울지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최종 목적인 종족 번식을 이룰 수 없다. 새싹에서부터 아름다운 꽃이 피어 만발하기까지 거센 비바람 등 온갖 고난을 다 견뎠을지라도 열매 맺지 못하면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만다. 결실은 종족 번식의 의미로 볼 때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이기에 매우 소중하다.
4연에서 말하는 ‘빛’은 참으로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서정적 시로 볼 때는 자연의 빛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시의 제목인 ‘여로’란 관점에서 볼 때 성경 창세기 1장 3절에서 말하는 빛이란 의미로 여겨진다. 수사학인 중의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빛’은 성경 1장 2절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인 흑암을 밝히는 빛이다. 이 빛은 생명의 빛(요 1:4)이요, 영원한 빛이다. 1장 14~16절에서 말한 광명체인 태양의 빛과는 다르다. 그러기에 넷째 날 태양의 빛을 창조하신 것이다. 시인은 신학박사로 깊은 성경의 이치와 가치관과 창조의 식견이 있기에 그리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5연과 6연에서 말하는 ‘갈’은 가을을 축약한 표현이니 가을의 빛과 바람은 자연의 빛과 바람이 아니라 성숙한 인간의 완성을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6연의 ‘고향’은 인생의 본향인 천국을 의미한 것이라 여겨진다. 또 갈바람을 ‘갈 바람’이라고 띄어 쓴 이유는 갈바람은 서풍 또는 서남풍을 가리키는 말이라서 뱃사람들은 갈과 바람을 띄어 쓰기도 한다. 일종의 ‘시적 허용어’라고 여겨도 좋겠다. 이런 관점으로 봤을 때 이 시는 참으로 뜻깊은 시(詩)이다. 서정성이 가미된 미의 세계에 기독교 사상이 깃들어 있으니 시의 의미가 배가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