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선교를 위한 전위렴 선교사의 헌신과 역경
유대모 선교사의 진단을 받은 전위렴 선교사는 곧 부인을 대동하고 귀국길에 올랐으며 그가 맡았던 사역은 부위렴 선교사와 엘비 여선교사가 맡았다.
한편 유대모 선교사는 자신의 요구대로 구암으로 선교지를 옮긴 후 구암 앞 강에 선교선을 띄워 자유롭게 의료진료를 했다. 이 선교선은 금강과 만경강을, 그리고 군산 앞바다에 있는 고군산 열도를 왕래하면서 진료도 하고 전도도 실시했다.
군산의 시민이 죽어갑니다
미국으로 요양을 갔던 전위렴 선교사는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을 잊은 채 군산의료원 설립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전위렴 선교사의 모금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으며, 점차 건강을 되찾게 됐다. 그래서 그는 건강도 되찾고 병원을 신축할 수 있는 모금도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유대모 선교사가 자신의 주택과 진료소를 병행해서 사용할 건축을 시작하면서 무리를 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도 미국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놓이게 됐다. 그래서 튼튼하고 건장한 부위렴 선교사가 유대모 선교사의 주택 겸 진료소의 건축을 이어 날마다 바쁜 일정 속에 지냈다.
그런데 그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유대모 선교사 가족은 끝내 군산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그를 대신해 1902년 가을 알렉산더 의료 선교사가 파송됐다. 그도 역시 그 넓은 옥구 들녘과 김제 들녘에 있는 선교 구역과 금강 건너편에 있는 장항, 한산, 서천, 임천, 부여 등지를 찾아 다니면서 열심히 선교에 전념했다. 이러한 결과 군산 지방에 있는 교회는 더욱 왕성해 갔으나 한창 의료진료를 하던 중 뜻하지 않게 귀국길에 오르게 됐다. 부친 사망의 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장남인 관계로 아버지의 재산도 정리할 겸 귀국했지만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다.
군산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다가 의사의 공백이 생기자 여기저기서 약을 달라는 등 아우성이 빗발쳤다. 이 광경을 지켜 봤던 부위렴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이해 자신의 어학교사였던 오긍선을 미국으로 데려가 의사 교육을 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편 부위렴 선교사는 엘비 처녀 선교사에게 구혼을 하고 1902년 하나님의 은총으로 알고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결혼예식을 올렸다. 그리고 약 1개월간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잊을 수 없는 전위렴 선교사
법관직을 포기하고
전위렴 선교사는 1865년 12월 10일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크리스천스벅에서 판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명문의 가정답게 그 어려운 법학을 연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판사가 됐다. 전위렴 선교사 역시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워싱턴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판사직에 회의를 느끼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워싱턴대학을 졸업하자, 곧 리치먼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남달리 성격이 예민해 성경대로 사는 일이 가장 위대한 인간의 삶이라 주장하고 늘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하루를 생활했다. 그가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성경대로 사는 삶이 가장 옳다고 주장했기에 그의 절친한 동급생 존슨의 권유로 한국 선교를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존슨은 1891년 11월 내슈빌에서 모이는 전국신학생선교연합회에 참석해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강연을 듣고 이눌서와 함께 리치먼드에 돌아와 전위렴에게 강연에 대한 보고를 자세하게 전했다. 그리고 존슨은 더 심층 있게 한국을 알고 싶어서 한국에 관한 책을 찾던 중 친척 집에서 한국에 관한 책 몇 권을 찾을 수 있었다. 존슨은 이 책을 곧 전위렴에게 읽도록 권하고 같이 한국 선교에 동참하자고 제의했다. 이 제의를 받아들인 전위렴과 역시 같은 급우였던 레이놀즈, 그리고 존슨 이렇게 세 신학생은 한국 선교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다.
이들은 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내슈빌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 있는 한국 선교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곧 거절을 당했다. 역시 이들은 기도가 부족했다고 판단하고 방과 후면 오후 3시에 기숙사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했다. 이들의 기도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계속됐다. 그러던 중 1892년 6월 어느 날 한국 선교지로 떠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떠날 준비에 분주했던 전위렴의 절친한 친구였던 존슨은 그만 한국 선교를 포기하고 한국과 이웃하고 있는 일본으로 지원했다. 그후 전위렴은 일본에 있는 존슨과 신학생 시절의 그 우정을 잊지 않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보도 교환하며 양국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전위렴은 서울에서 얼마 동안 머문 후 곧장 군산교회 설립에 힘을 기울였고, 1902년에는 구암에 있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남녀학생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실시했다. 그래서 전위렴 선교사의 사랑방에는 남학생들이 모여 보통과 과정을 교육받았고, 전위렴 선교사 부인의 안방에는 여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군산 영명학교와 전위렴 선교사
전위렴 선교사는 군산 영명학교 보통과 책임을 맡으면서 교육에 열중했으며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전위렴 선교사가 일밖에 모르는 일벌레로 소문날 정도면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그만 병에 걸려 군산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정열을 쏟으면서 일을 했던 군산을 떠난다는 것은 그에게는 참으로 큰 괴로움이었다. 군산선교부 캠퍼스 안에는 그가 친히 건축했던 자신의 주택과 모금해서 얻어진 재정으로 설립된 구암예수병원, 그 외에도 여러 시설들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전위렴 선교사의 피와 땀의 결실이라 해도 부인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주감예수병원 원장인 다니엘(Dr. T. H. Daniel) 의사는 그에게 전주에 가서 쉴 것을 권했다. 단 조건은 30리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전위렴 선교사에게 있어서 군산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정성을 다해 설립한 군산 개복교회, 군산 구암교회, 지곡교회, 지경교회, 김제 송지동교회, 익산 남전교회 등 수많은 교회들이 그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었고, 정성을 쏟았던 두 남녀 학교도 계속 발전해가는 중이었기에 이러한 모습을 보고 떠나는 그는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어 그는 가족들과 군산을 떠나야 했다.
특별히 그가 군산에 미련을 두었던 것은, 그가 군산에 부임하자 얼마 안 된 때에 자신의 첫째 아들이 이질로 고생하다가 그만 하나님 나라에 가고 마는 슬픈 일을 당했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군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몸은 해가 갈수록 더욱 허약해졌고, 할 수 없이 의사의 명령에 따라 군산을 떠나게 되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