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피스티스(πστισ)’이다. 이 단어는 ‘진실, 신실하다’의 의미로 영어 ‘faith’의 어원이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진실과 진실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난다. 친구 간의 관계이든, 동료 간의 관계이든, 이웃과의 관계이든, 부부간의 관계이든 서로가 진실할 때 그 관계가 지속된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진실(뜻) 앞에서 내가 진실할 때, 바로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이란 단어 앞에는 하나님의 말씀(뜻)이 생략되어 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을 이의 없이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진실은 불변인데, 인간의 진실이 문제다. 인격은, 항상 행동의 일관성에서 나온다. 진실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은 일관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진실로부터 나오지만, 진실은 앎만으로 성취될 수 없다. 앎도 중요하지만, 삶이 연결될 때 일관성과 진실성이 증명된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물으셨다. 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였나이다’ 대답할 때, 그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말씀하셨다. 사실 율법사는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믿음이란 ‘앎’이 아니라 ‘삶’이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율법사의 정곡을 찌른 말씀이다. 율법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가 나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결론을 맺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야고보 사도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지식적인 앎은 있는데 삶이 없어서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믿음은 앎에서 머무르지 않고 삶으로 이어질 때 증명되어 진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진리의 말씀)과 나의 진실(앎과 삶)이 만나는 곳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가 부인되는 십자가 아래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깨어 있을 때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삶이 지속될 때 앎과 삶이 일치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행하는 그리스도인을 기다리고 있다.
김대훈 목사
<포항대송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