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주일학교 친구가 종로에서 도매상을 크게 운영했다.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종업원부터 시작해서 제법 사업에 성공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부도가 났다는 것이다. 친구와 어렵게 통화가 되어서 그동안 사정을 듣게 되었다. 결론은 은혜의 옷을 입다가 은혜의 옷이 벗겨진 것이다.
사업은 갈수록 성장하고 규모가 커지면서 거래처 대표들과 골프며, 바다낚시며, 등산이며, 친교를 쌓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점차 새벽기도, 수요기도, 금요기도, 나중에는 주일예배까지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부도로서 은혜의 옷이 완전히 벗겨진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불순종함으로 타락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담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담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기서 한번 질문해 보자. ‘벗었다’는 말은 무엇을 ‘입고 있었다’는 뜻이다. 무엇을 입었기 때문에 ‘벗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6장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의 옷이 있다. 그리스도인만 입을 수 있는 옷이다.
그렇다면 원래 에덴동산에서도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바로 ‘은혜의 옷’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은혜의 옷’이 있다. 그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범죄함으로 은혜의 옷이 벗겨진 것이다. 은혜의 옷이 벗겨지는 순간 인생은 꼬이게 된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옷을 입고 산다. 은혜의 옷을 입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만 죄악으로 벗겨질 때는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다윗이 은혜의 옷을 입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산성이시며, 반석이시며, 요새시며, 피할 바위시며, 방패시며, 구원의 뿔이 되어 주셨다. 그러나 간음죄와 살인교사죄를 지은 후에는 은혜의 옷이 벗겨지고 결국 칼이 다윗의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리라는 나단 선지자의 불행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며 인생이 꼬이게 된다. 그러나 다윗은 꼬인 인생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시편 51편 17절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은혜의 옷이 벗겨졌다면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입어야 한다.
로마서 13장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의 옷을 입게 되었다.
마태복음 22장 11절에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나온다. 성도는 은혜의 옷을 입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은혜의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은혜의 옷은 어떻게 입는가? 계시록 7장 14절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은혜의 옷을 깨끗하게 하는 길은 오직 어린 양의 피로서 깨끗하게 될 수 있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라. 은혜의 옷은 보좌에 계신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거룩한 예배로서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앞서 어릴 적 주일학교 친구와 다시 통화했을 때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기도, 수요기도, 금요기도, 주일예배 모든 예배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은혜의 자리에 있어야 은혜의 옷을 입을 수 있다. 벗겨진 은혜의 옷을 다시 입고 꼬인 인생이 다시 회복되는 친구를 기대한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성도는 하나님이 입혀주신 은혜의 옷을 입고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여김 받는다.
정찬경 목사
<장수신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