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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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영명학교 · 3.1운동 민족 교육… 독립의 열망

그가 설립한 개복교회와 구암교회, 그 외에도 여러 지역의 교회를 부위렴 선교사와 하위렴 선교사에게 맡겼으며, 군산 영명학교는 부위렴 선교사에게, 군산 멜본딘여학교는 엘비 선교사에게 맡기고 정들었던 군산을 떠나 전주로 처소를 옮겼다.

그런데 전위렴 선교사가 전주에 올 무렵, 최의덕 선교사는 은송리에 있는 전주교회를 전주성 안 가까이로 옮겨야 한다면서 전주천을 건너 전주천 가까운 성문 밖에 열무밭, 배추밭을 매입하고 기역자 교회를 신축하는 중이었다.

전위렴 선교사는 예수병원 근처에 있는 선교사촌에 살면서 예수병원에 자주 다니며 건강을 체크하고 있었으나 치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전주 서문교회 건축과 전주 근교에 있는 교회를 돌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 갔으며, 이 일로 전주 예수병원에 있던 의사들도 몇 차례 경고를 내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위렴 선교사는 1907년 전주 서문교회의 마지막 성탄절 예배에 참석하고 1908년 1월 2일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부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병이 낫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참으로 하나님은 무정했다. 이국 이역만리 그 머나먼 길을 떠나 낯선 한국 땅 전주에서 생을 마감하는 전위렴 선교사의 고별식에는 많은 동료 선교사, 그리고 그를 평소에 따랐던 한국인 목회자들, 그리고 군산 개복교회, 구암교회, 전주 서문교회 교인들이 참석해서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됐다.

그의 시신은 그가 뼈를 깎으면서 선교의 정성을 바쳤던 군산 구암동산에 안장됐다. 많은 선교사들과 군산교회 교인들은 그의 부활의 약속을 믿고 구암을 떠났으며, 그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그의 선교정신이 너무 훌륭해서 전주에 있는 전주여학교를 기전여학교(Junkin Memorial Girl’s School)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정성을 쏟아 설립한 군산 영명학교는 부위렴 선교사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게 됐으며, 더욱이 충청남도 한산에 있는 한영서원 중등부가 폐지되면서 그 학교 학생들이 대거 군산 영명학교로 왔다. 한영서원의 고장으로 있었던 김인전 장로는 이 학교에 부임하면서 민족 교육을 실시했으며, 그의 영향으로 박연세는 일생 동안 한국 교회와 한국 민족을 지키다가 순교의 장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군산 영명학교에는 군산 시내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서남 지방에 있는 여러 곳의 학생이 진학을 했으며, 이미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충청남도 서남 지방에 있는 여러 고을 청소년들이 이 학교에 적을 두고 열심히 공부했다.

특별히 이 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의 절대적인 재정지원과 미국 남장로교 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운영됐다. 당시 전라북도에는 전주에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가 각각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군산도 이 두 학교 못지않게 학생들의 실력향상에 온갖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한국인 교사들은 내일의 민족 일꾼을 키운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일합방이 이뤄지면서 군산은 다른 도시에 비해 일본인들이 대거 상륙했는데 그들 중에는 고리대금업자로 끼여 있었다. 그들은 군산에 도착해 한국인이 매물로 내놓은 농토를 거의 헐값으로 매입했다.

“지금 우리가 땅을 매입하지만 이 땅을 우리 일본으로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땅을 팔더라도 그냥 당신네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군산과 옥구 및 김제 들녘에 살고 있는 순진한 농민들은 한 필지, 두 필지씩 일본인에게 팔았으며 이 일로 일본인들은 매일같이 토지 매입에 열을 올렸고 한국인 농부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한국인들은 더 이상 일본인에게 수모를 당하면서 살 수 없다 해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그런가 하면 한일한방이 이뤄지면서 일제는 식민지 교육과 천황제 교육을 취지로 각 고을마다 보통학교를 설립했다.

선생님, 서울에서는 3‧1 운동이…

군산 영명학교는 철저한 민족 교육을 실시했는데, 때마침 민족의식이 철저한 박연세는 이 학교에서 한국역사와 한문을 가르쳤다.

“선생님, 지금 서울에서는 3‧1 운동을 거국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군산 지방은 선생님이 책임지시고 3‧1 운동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군산 영명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김병수의 말이었다.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김병수를 눈여겨봤던 이갑성은 그를 불러 군산 3‧1운동 책임자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교사 박연세를 추천했다.

박연세는 김병수 학생의 소상한 이야기를 듣고 그 길로 같은 학교 교사인 이두열, 김수영 등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다시 이들 교사는 학생인 전세종, 조옥초, 김영우, 송기옥 등에게 알린 후 이들로 하여금 3‧1 운동 준비에 힘을 쏟도록 했다.

이들 학생들은 즉시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밤낮 가리지 않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박연세는 다른 교사들과 협의해 1919년 3월 6일 군산 장날을 기해서 대대적인 3‧1 운동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군산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기숙사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든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은 곧 소대 병력을 이끌고 와서 주도 교사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교사 등을 체포하고 불온문서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압수했다. 교사들을 체포해서 양손에 수갑을 채워 끌고 가는 모습을 본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학교 종소리와 함께 영명학교 운동장으로 모였다. 그 옆에 있는 멜본딘여학교 학생들도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독립선언서를 들고 질서 정연하게 영명학교 운동장으로 모였다.

약 100여 명의 남녀 학생들, 그리고 교사들, 구암예수병원 직원들은 군산경찰서를 향해서 나아갔다. 때마침 길 옆에 있던 군산보통학교 학생들도 여기에 합세했다. 이들이 시내에 거의 접어들자 개복교회 김성은, 유희순 등이 참여하면서 시위대 군중은 약 500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 때문에 겁에 질린 일본 경찰들은 이리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대 병사들을 동원해 시위 진압에 나섰으며 이 일로 46명이 검속됐다. 이들은 각종 고문으로 엄청난 수모를 당했다.

3‧1 운동으로 충격을 받은 군산보통학교 70여 명의 학생들은 자퇴서를 작성해 일인 교장 앞에 제출하기도 했으며, 일부 다른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 교육의 본산인 군산보통학교 일부의 건물을 소각하기도 했다. 이 운동은 일회적인 운동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3월 30일 밤을 이용해서 1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등불행진을 벌이면서 힘찬 구호를 외쳤다.

“구속자를 석방하라. 한국은 독립했다. 일본인은 물러가라.”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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